매진. 오늘도 실패다. 한 시간씩 하루 8회 차 입장하는 전시 관람이 2주 후까지 전량 매진이다.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창인 ‘이건희컬렉션 특별전:한국미술명작’ 전시 얘기다. 지난 7월 21일에 개막한 이 전시를 좀체 볼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전시는 내년 3월까지 이어지지만 이 추세라면 아예 놓칠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관을 출입처로 둔 기자도 막막한데 일반 관객들의 심정은 어떨까.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수집한 미술품이 유족에 의해 국립 기관과 지방 공립 미술관 등지에 기증된 후 전국이 ‘이건희 컬렉션 신드롬’으로 달아올랐다. 대구미술관의 ‘이건희 기증작 특별전’에는 51일간 약 4만 명이 다녀갔다. 이건희 컬렉션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예약 전쟁’을 벌이는 동안 지방자치단체들 간에는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희망하는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미술 향유에 대한 국민적 욕구가 확인되면서 미술관 하나가 쇠락한 도시를 되살렸다는 이른바 ‘빌바오 효과’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커진 탓이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최형두 의원(국민의힘)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미술관의 41.5%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고 하니, 지자체 입장에서 ‘문화 분권’을 강조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지자체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기증관’은 서울에 자리 잡는 것으로 확정됐고, 낙담한 지자체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일부 지자체는 기증 받은 ‘이건희 컬렉션’을 공유할 생각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유치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최근에는 황희 문체부 장관의 지역 방문 계획을 두고 한 지자체장이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유치의 긍정적인 신호”라며 기자들에게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문체부 해당 부서에 문의하자 “희망 사항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자칫 미술관 분관에 대한 비수도권 지역민들의 바람을 놓고 중앙정부가 정치적 계산을 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미술관 건립 및 국립미술관 분관을 두고 정책이 혹여나 정치로 변질될까 염려된다.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달아오르고, 황 장관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 서둘러 전시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을 때부터 미술·문화재계 전문가들의 우려는 시작됐다. 미술관·박물관 종사자들에게 ‘전시’는 단순한 ‘보여주기’가 아니다. 체계적 연구를 기반으로 보다 깊이 있는 내용을 내놓는 게 ‘전문가’들의 역할이다. 기증자의 의도도 분명 그랬으리라.
문체부는 지방 미술관 건립을 포함해 이건희 컬렉션의 지역 순회전 등 다양한 방안을 계획하고 있다지만 이와 관련된 공청회나 전문가 토론회는 찾아볼 수 없다. ‘밀실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과거 2003~04년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재임 때 국립현대미술관의 ‘1도 1분관’이 검토된 바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이 과천에, 덕수궁관이 서울에 있으니 그 외 지역에 특성화 한 분관을 설치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테면 휴전선 접경 지역인 강원도 및 경기도 쪽에는 국립민족미술관, 제주도에는 국립국제미술관을 건립하는 식이다. 청주 흥덕사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직지’가 제작됐으니 충청북도에는 판화 등으로 특화한 미술관이 가능하다는 방식이다. 명분과 의미가 확고했고 체계적이었다. 황 장관과 문체부의 계획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자체들은 답답해하고, 전문가들은 한심해한다. 투명하고도 전문성을 존중한 정책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