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코로나19로 멈췄던 지역 축제들이 하나둘 재개되기 시작했다. 비대면 시대를 넘어 ‘위드 코로나’ 시대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는 신호다. 지난 2년간 여행이 재개되기를 손꼽아 기다려온 여행객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다. 때마침 국화·개미취·코스모스 같은 각양각색의 가을꽃들이 만개하며 산과 들을 수놓는 계절, 단풍 못지않은 가을꽃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 올가을 첫 번째 여행지로 ‘꽃과 바다의 고장’ 충남 태안을 다녀왔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로 펼쳐진 쪽빛 바다 풍경과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낙조는 덤이다.
태안이 처음 ‘꽃동네’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78년 남면 신장리에서 시작된 튤립 재배 때부터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간척 사업으로 마을 앞 갯벌은 농토가 됐고 생활 터전을 잃어버린 주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바다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이 팍팍해진 삶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게 꽃 재배였다. 장미·백합·국화·고데티아 등으로 재배 품종이 확대되면서 동네 야산은 알록달록 꽃동산으로 변했고 마을 집집마다 화단이 만들어졌다. 어촌 마을에 찾아온 작은 변화는 태안이 안면도국제꽃박람회·태안튤립축제·팜파스축제 등을 개최하는 세계적인 화훼 메카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국화 제치고 가을의 대명사 된 외래종 팜파스·핑크뮬리
청산수목원 고(故) 신세철 원장이 꽃과 나무를 가꾸기 시작한 것도 마을에 화훼 산업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허허벌판 언덕에 꽃을 재배해오다가 나무와 식물도 함께 가꿔 사계절 내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키워냈다. 올해로 문을 연 지 30년째인 수목원은 총 10만 ㎡ 규모로 국내외에서 수집한 200여 종의 연과 수련, 부처꽃·물옥잠·물양귀비·꽃창포 등 40여 종의 수생식물, 노각나무 등 100여 종의 수목, 섬말나리·비비추 등 300여 종의 야생화가 자라는 중견 식물원으로 성장했다.
지금 수목원에서는 가을을 맞아 팜파스축제가 한창이다. 억새의 일종인 팜파스그라스는 남미 초원 지대에서 자라는 볏과 식물로 키가 3m까지 자란다. 억새보다 키가 크고 꽃도 풍성해 조경용으로 인기인 식물이다. 팜파스 하나만 떼어놓고 보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황금빛으로 물든 한국의 들녘 풍경과도 잘 어우러진다. 팜파스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해 질 녘이다. 솜털 같은 순백의 꽃 무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바람에 넘실대는 풍경이 장관이다. 팜파스축제는 꽃이 질 무렵인 오는 11월 25일까지다.
팜파스가 순백색을 자랑한다면 핑크뮬리는 주변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핑크뮬리 역시 미국에서 들어온 외래종 식물이다. 꽃은 아니지만 군락이 자아내는 이색적인 분위기로 꽃보다 더 인기를 끌면서 몇 년 전부터 가을을 대표하는 식물로 자리 잡았다. 청산수목원도 곳곳에 핑크뮬리를 심어놓았다. 분홍빛으로 넘실거리는 핑크뮬리는 주변을 압도할 만큼 강렬한 색감을 자랑하며 수목원을 찾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청산수목원은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면서 주변과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는 게 포인트다. ‘밀레정원’ ‘모네의 연원’ ‘만다라정원’ ‘피타고라스정원’ ‘삼족오미로공원’ 등의 테마별로 각기 다른 야생화와 수생식물이 식재돼 있고 가는 길목마다 황금삼나무길·메타세쿼이아길·낙우송길이 조성돼 구석구석을 다 둘러봐야 다양한 식물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천리포해변에 자리 잡은 원조 수목원…1만 6,900여 종 식물 한자리에
소원면에 위치한 천리포수목원은 1970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설립자인 고(故) 민병갈(1921~2002년) 원장은 1945년 미군 정보장교로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후 한국의 자연에 매료돼 1970년 이곳에 수목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인으로 귀화해 본격적으로 수목원을 가꿔오며 여생을 보냈다. 수목원이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한 건 설립 40년 만이다. 주로 식물 연구자나 후원자에게만 공개해오다가 2009년부터 일부 공간을 일반에 개방하기 시작했다.
천리포수목원은 국제수목학회에서 인증한 아시아 최초의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1만 6,900여 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안내소부터 산책로 주변으로 오밀조밀 심어진 국화과 털머위가 가을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노란색 꽃을 피운 기본종 털머위부터 ‘아우레오마쿨라툼’ ‘아르겐테움’ 등 다양한 품종을 만나볼 수 있으며 진한 향기를 품은 은목서를 비롯해 보라색 열매를 맺은 좀작살나무, 연보라색의 진다이개미취, 코일레스티눔등골 등 평소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종의 가을꽃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전체적인 수목원의 가을 풍경은 화려하기보다 담백하고 소박하다. 설립자의 뜻에 따라 인위적인 관리를 최소화하고 식물들이 자연의 섭리대로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수목원에 비해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산책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선 나무와 접목 기술로 새 생명을 얻은 나무들을 곳곳에서 마주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천리포수목원의 또 다른 매력은 바다와 섬의 풍광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천리포해변을 따라 조성된 노을길 산책로에서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광활한 꽃밭에서 인생 사진 남기고 싶다면
광활한 꽃밭에서 사진을 남기기에는 안면읍 코리아플라워파크가 제격이다. 꽃지해수욕장에 위치한 코리아플라워파크는 과거 안면도국제꽃박람회가 열렸던 장소다. 박람회 이후 화훼 테마공원으로 운영되면서 겨울을 제외하고 계절별로 다양한 꽃을 전시하고 있다. 가을꽃박람회가 진행되는 공원에서는 천사의 나팔, 안젤로니아, 천일홍, 코키아, 쿠르쿠마 등 여러 종의 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올가을 최고의 인기는 단연 안젤로니아다. 안젤로니아 꽃밭 사이로 설치된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떠 만든 조형물이 촬영 포인트다.
‘바람길’ 따라 걸으며 서해안 낙조 감상도
바다도 빼놓을 수 없는 태안의 볼거리다. 태안에서는 100㎞가 넘는 해변길 가운데 안면도의 최남쪽 해변을 지나는 7코스 ‘바람길’을 으뜸으로 꼽는다. 황포항에서 바람아래해변·고남패총박물관을 거쳐 영목항까지 16㎞ 거리로 걸어서 총 5시간이 소요된다. 그중에서도 샛별해수욕장과 장삼포해수욕장 사이에 위치한 운여해변은 낙조 촬영지로 유명한 서해안 일몰 명소다. 평소에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이지만 일몰 때가 되면 사진 촬영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