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피플

[라이프점프 ‘커튼콜’] “다시 <서편제>같은 영화 만들고 싶다”던 꿈 못 이루고 떠나다

‘한국 영화계 거목’ 이태원 전 태흥영화사 대표 별세

1959년 <유정천리>로 영화계 입문…흥행 실패로 영화계 떠나 있기도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과 ‘충무로 삼총사’로 불려


■ 라이프점프 ‘커튼콜’은…


유명 작가 스티븐 킹은 부고 기사를 쇼가 끝난 뒤 배우들이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인사하는 '커튼콜'에 비유했습니다. 부고 기사는 '죽음'이 계기가 되지만 '삶'을 조명하는 글입니다. 라이프점프의 '커튼콜'은 우리 곁을 떠나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그들이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는 코너입니다.

임권택 감독, 이태원 전 대표, 정일성 촬영감독(왼쪽부터)/사진=네이버 캐스트임권택 감독, 이태원 전 대표, 정일성 촬영감독(왼쪽부터)/사진=네이버 캐스트




“그래, 하자”



15년간 임권택 감독과 영화 11편을 함께 만든 이태원 태흥영화사 전 대표가 임권택 감독에게 항상 하던 말이다. 살아생전 이태원 전 대표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작 관련 제안에 한 번도 반대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덕분에 임권택 감독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장군의 아들>, <서편제>, <태백산맥>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 영화계의 역사와 같은 영화들을 제작한 이태원 전 대표가 지난 24일 영화만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이날 빈소에는 임권택 감독과 임상수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배우 최민식 씨 등의 조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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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전 대표는 1938년 평양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지주였고 정미소와 양조장을 경영해 부유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유복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때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부산에서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됐지만, 방 하나에 열 명이 넘는 식구가 살 정도로 생활은 어려워졌다.

그는 어려워진 집안 환경과 복잡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일찌감치 돈벌이를 시작했다. 장사 수완이 좋아 스스로 3년 동안의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 배재고등학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영화계와 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59년이다. 이 전 대표의 첫 영화 <유정천리>가 이때 만들어졌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한 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던 그는 1973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극장을 운영하며 다시 영화계와 인연을 맺었다. 10년 뒤엔 태흥영화사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이태원 전 대표는 1984년 <무릎과 무릎사이>를 시작으로 <어우동>(1985), <뽕>(1985),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경마장 가는 길>(1991) 등을 연달아 제작했다. 이 전 대표와 임권택 감독과의 인연은 1989년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제작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임권택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이태원 작자’는 ‘충무로 삼총사’로 불리며 15년간 함께 영화를 제작했다. 이태원 전 대표의 삶을 다룬 영화 ‘하류인생’까지 이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12편의 영화 중 개벽을 제외한 11편을 둘이 함께 제작했으니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영화계는 ‘충무로 삼총사’가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함께 영화를 만들며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영화 인생을 술회하는 글인 ‘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에서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이 흥행에 성공했을 당시를 회고하며, “영화는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남이 하지 않은 장르, 남이 시도하지 않은 이야기를 과감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서편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던 이 전 대표는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별이 됐다.


정혜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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