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여건을 갖추고 도입해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데 그냥 밀어붙이는 형국이니 우려가 될 수밖에요.” (고교학점제 연구 학교 A 교사)
고교학점제는 대통령의 1호 ‘교육 공약’으로 자율형사립고 폐지와 함께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교육정책이다. 고교생이 대학 수업처럼 본인의 적성과 선호도 등에 따라 과목을 골라 수업을 듣고 기준 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제도다.
교육부는 올 2월까지만 하더라도 일반고의 경우 현 초등학교 6학년이 고교 1학년이 되는 오는 2025년에 고교학점제를 전면 시행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8월 현 중학교 2학년생이 고교에 입학하는 2023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사실상 시행 시기를 2년 앞당긴 것이다.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고교학점제 도입 취지에는 대체로 공감한다. 획일화된 입시 위주의 교육을 정상화하고 학생들이 자기 주도 학습으로 적성과 진로에 맞게 다양한 수업을 선택해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문제는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필수 선행조건과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급하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초중등 교육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고교학점제를 불과 1~3년 이내에 차질 없이 도입할 수 있을지에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현재 초등학교 6학년은 고교학점제 본격 적용과 더불어 2024년 2월 수학능력시험 등 대입 개편안까지 앞두고 있어 이를 둘러싼 혼선은 불 보듯 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고교학점제를 두고 벌써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대입 제도와의 엇박자 때문이다. 고교학점제가 입시 경쟁의 부담에서 벗어나 진로와 적성에 따라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듣는 제도인 만큼 대입 전형에서 학교생활기록부가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민 사태’ 이후 대입 공정성 강화를 이유로 서울대 등 서울 소재 16개 대학은 정시 모집(수능 위주) 비율을 40% 이상으로 늘렸다. 특히 현 중학교 1·2학년 학생은 현행 내신 평가 체계나 수능의 적용을 받으면서 고교학점제 대상이 돼 혼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학생부종합(학종) 전형에 대해 불공정성이 제기됐는데도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를 도입하는 것은 절차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고교학점제를 보면 교육 당국이 고교 교육과 대학을 혼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며 “고교생의 가장 큰 목표는 대학 진학인데 입시와 엇박자가 나면 정착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7월 고교학점제 연구·선도 학교 교원 54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진행한 결과 ‘대입 제도 개편 방안 우선 제시(71%)’를 요구 사항으로 가장 많이 꼽았다. 현재 교육 당국은 고교학점제 시행에 맞춰 2028학년도 수능 체제 개편을 논의하고 있다.
교원 수급 계획도 불확실하다. 고교학점제가 안착되려면 다양한 선택과목을 가르칠 교원이 충분히 확보돼야 한다. 하지만 교육 당국은 저출산에 따른 학생 수 감소를 반영해 신규 교원 채용을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육 당국은 과목 수가 늘어날 것을 고려해 외부 전문가를 기간제 교사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지만 현직 교사들은 반대하고 있어 교원 확충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학점제 도입으로 선행 학습이 강화돼 사교육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한 입시 전문가는 “고교학점제가 전면 적용되는 2025년부터 고1 때 배우는 공통과목 내신에만 상대평가가 적용되는데 학부모와 예비 고교생들에게 ‘고교 1학년 과정까지는 무조건 선행 학습으로 기초를 마련해놓아야 한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며 “실제로 초등학생 6학년과 중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고교 1학년 과정에 대한 선행 학습 문의가 최근 급격히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일부 교육계 인사들은 1년도 채 남지 않은 임기 말 정부가 정권 교체 이후인 4년 뒤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등 보수 정권에서도 고교학점제가 추진됐었고, 최근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고교학점제 시행을 위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는 점에서 폐지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관련 인프라를 충분히 갖춘 후 도입하는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교학점제는 시간이 걸려도 결국 도입될 것”이라며 “다만 우려도 나오는 만큼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