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 규제와 글로벌 공급망 불안을 겪은 삼성전자가 안정적인 반도체 생산 체제를 갖추기 위해 장비·부품 국산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반도체 장비를 구성하는 핵심 부품들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유럽에서 만들어지는데 이를 내재화해 외부 요인으로 인한 리스크를 최소화겠다는 취지다.
16일 전자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 장비 자회사 세메스는 주력 반도체 장비인 ‘세정 장비’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부품 국산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메스는 삼성전자가 91.5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장비 내 핵심 부품 ‘펌프’ 분야 국산화를 위해 국내 부품 공급사들과 연구개발(R&D)에 이어 실증 테스트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펌프는 반도체 공정이 이뤄지는 공간인 챔버에 남은 오염 물질을 빨아들이거나 압력을 발생시켜 공정에 필요한 화학 물질을 챔버 안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세메스는 공정 이후 웨이퍼에 남은 찌꺼기를 떼어낼 때 필요한 화학 물질을 세정 장비로 운반하는 케미컬 펌프 국산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전자에 납품되는 장비용 케미컬 펌프 대부분은 일본 업체들이 독식하고 있다. 지난 2019년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한 수출 규제 문제가 터졌을 당시 일본 의존도가 높은 고위험 품목으로 지정됐을 정도다.
세메스의 최근 경력 사원 공채에서도 핵심 부품 국산화 의지가 엿보인다. 세메스는 최근 ‘요소 기술’ 경력 분야를 추가했다. 일본 의존도가 높은 정전척(ESC)과 광학계·렌즈 관련 장비 부품 전문가를 선발하는 것은 국산화를 위한 시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상당히 이례적인 채용으로 회사 차원에서 반도체 장비 안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 내재화 계획을 본격 가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세메스는 삼성 반도체 팹에 핵심 전공정 장비를 공급한다. 국내 반도체 장비 회사 중 매출 1위다. 이 회사는 지난 일본 수출 규제 사태 이후 웨이퍼 전 공정에서 회로를 깎아내는 고난도 식각 장비를 국산화하는 등 장비 기술을 내재화했다. 하지만 장비 속에 들어가는 일부 핵심 부품 해외 의존도가 여전히 높아 공급망 위기 요인이 여전하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왔다. 세메스가 최근 R&D에 공을 들이고 부품사들과 적극적으로 협력에 나선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시도는 향후 열악한 국내 반도체 장비 부품 생태계까지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세메스가 삼성전자 자회사인 만큼 삼성의 적극적인 국내 반도체 공급망 내재화 전략이 상당 부분 반영돼 있다는 주장도 있다.
홍상진 명지대 교수는 “핵심 부품이 고장나면 장비 시스템 자체가 마비될 만큼 장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아직 해외 의존도가 높다”며 “핵심 장비 부품 생태계를 더욱 강화할수록 국내의 반도체 저변 기술이 넓어지고 튼튼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는 국내 장비 부품 기업 투자에도 나섰던 사례가 있다. 지난해 11월 미코세라믹스 등 국산 반도체 장비 부품 업체들에 투자하며 협력을 강화했고 2017년에는 국내 반도체 제조용 소재 업체인 솔브레인과 동진쎄미켐 등에도 지분을 투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