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내년 초 대통령 선거를 치러는 것과 비슷하게 중국(중화인민공화국)도 내년 말에 공산당 수뇌부 교체에 들어간다. 말을 ‘수뇌부 선거’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즉 선거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국가 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공산당 수뇌부 결정이 곧 국가원수 결정이나 마찬가지다.
선거를 하지 않으면 그럼 어떤 방식으로 할까. 전임자가 후임자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만약 전임자가 후임자를 아예 결정하지 않고 “나 그냥 계속 할래”라고 하면 곧바로 장기집권으로 이어진다.
“중국 체제는 ‘독재’ ‘권위주의’”라는 미국 등 서방의 비난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시스템이 ‘인민민주’라고 주장한다. 서방의 민주가 가짜이고 중국이 민주가 진짜라는 이야기다. 또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민주가 있는데 중국식 민주가 더 낫다는 주장도 된다. 중국에서 ‘인민민주’라고 할 때 이는 “인민들에게 결국 이익이 되는 민주”라는 의미다. 서방의 민주와 선거 제도는 결국 기존 권력자와 부유층을 공고히 하는 대신 중국의 ‘인민민주’가 더 인민들에게 유리하다는 나름대로의 해석이다. 정말 그럴까.
보편적으로 민주제도의 핵심은 대표를 뽑는 선거다. 이는 민주국가의 기본 이념이다. 국민들의 의사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선거제도를 만드는 것이 민주국가들의 염원이었다. 이는 결국 선거제도를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선거의 핵심은 최고 통치자를 뽑는 대통령 선거다.
한국의 대통령 역할을 하는 것은 현재 중국에서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다. 과거 마오쩌둥 시기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당 주석)’이었다. ‘주석’이 ‘총서기’로 바뀐 이유는 주석의 권력이 너무 크다는 의미에서 “힘을 빼자”는 취지에서였다. 어쨌든 현 시스템에서 공산당 총서기는 국가 주석을 겸하기 때문에 중국내 최고권력자가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최고권력자는 마오쩌둥이었다. 마오가 공산당 주석이 된 것은 일반적으로 알다시피 국공내전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먼저 내전 가운데 실력을 인정받아 공산당 주석이 된 이후 기존 국민당 정권마저 무너뜨리면서 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새로운 국가(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인 국가주석도 당연히 그가 차지했다. 한국의 경우 해방 후에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대통령을 뽑았지만 중국은 아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런 식의 권력자 선임 제도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마오쩌둥이 공산당 주석으로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한 것은 27년(1949~1976)이나 됐다. 그는 죽어서야 최고권력을 내려놓았다. 공산당 정권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누군가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야 했다. 그가 죽고 나서 후임자는 선거를 했을까. 물론 아니다.
생전에 이미 ‘새로운 사회주의 황제’로 인식된 마오쩌둥은 그 자신이 후계자를 지명했다. 왕조 시대에 현 임금이 새로운 임금을 지명하는 방식과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아들 등 핏줄을 후계자로 뽑지 않은 것은 북한과 다른 점이다. 마오쩌둥의 아들은 앞서 모두 사망했기 때문이다.
당초 마오쩌둥의 후계자 구상에는 여러 명이 등장했다. 사실상 모두 실패한다. 처음 제시된 사람은 혁명과 전쟁 과정에서 동지였던 류샤오치다. 그는 마오쩌둥에 반역했다는 오명을 쓰고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숙청된다. 다음이 린뱌오, 왕훙원, 덩샤오핑 등이 잇따라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낙점된 것이 화궈펑이었다.
화궈펑의 집권 방식이 중국에서 선거의 의미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사망한 마오쩌둥이 화궈펑을 후계자로 찍었다는 소식에 남은 공산당 수뇌부들은 그를 거의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1976년이다. 국민들의 지지나 투표는 필요하지 않았다. 화궈펑이 집권한 후 대대적인 선전과 선동으로 최고지위를 굳혔을 뿐이었다.
다만 화궈펑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바로 1978년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는다. 그는 한때 마오쩌둥의 후계자 명단에도 있었는 데 잠시 숙청됐다가 마오 사후에 복권됐고 이후 화궈펑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했다.
물론 덩샤오핑도 국민의 뜻을 묻지 않았다. 공산당 수뇌부를 장악한 사람이 곧바로 중국의 통치자가 되는 시대는 이어졌다. 다만 이미 고령인 덩샤오핑은 직접 통치보다는 대리인을 내세웠다. ‘당 주석’를 폐지하고 ‘총서기’로 바꾼 이후 이 자리에 후야오방을 앉혔다. 후야오방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자오쯔양으로 다시 바꿨다가 마지막에 장쩌민을 내세웠다.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개혁개방 이후 등장해 3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사람이다. 후진타오, 시진핑을 잇는 현재 시스템의 최초의 권력자다. 덩샤오핑은 경제에서는 개혁개방을 주장했지만 정치에서는 이른바 ‘공산당 영도’, 즉 공산당 독재를 그대로 유지했다.
장쩌민은 1989년 공산당 총서기가 됐다. 기존 총서기였던 자오쯔양이 톈안먼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직후였다. 장쩌민이 총서기가 되는 상황을 되돌아보자.
당시에는 덩샤오핑을 비롯해 8대 ‘원로’가 실질적으로 통치를 하고 있었다. 원로라는 것은 과거 중국 혁명의 공로자들로 이들은 자신들이 일선 통치자들의 후견인이라고 여겼다. 톈안먼 사태의 수습 차원에서 다음 총서기를 뽑아야 하는데 덩샤오핑의 발언권은 상당히 약해진 상태였다. 덩은 앞서 지명된 후계자였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실패로 다소 풀이 죽었다.
당시 덩샤오핑에 버금가는 권력자였던 원로 천윈이 상하이 공산당위원회 서기 장쩌민을 추전했다. 다른 원로들은 또 다른 사람을 추천했지만 덩샤오핑이 천윈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결국 장쩌민이 총서기가 됐다. 갑자기 낙점된 장쩌민 개인으로서는 얼떨떨한 일이었을 것이다.
덩샤오핑으로서는 개인적으로 장쩌민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당시까지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론에는 다소 시큰둥한 보수파로 알려져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음이 안 놓였는지 장쩌민의 후계자로 동시에 후진타오까지 미리 정해 놓았다.
1992년 장쩌민은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5년 임기 두 번에 총 10년 간 집권을 약속받았다. 이때 후진타오도 국가 부주석으로, 장쩌민을 이어 10년간의 권력을 역시 약속받았다. 물론 국민들의 지지나 선거는 필요 없었다. 국민의 지지는 선전과 선동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 중국식이다.
이처럼 시진핑 시대 이전까지 중국의 최고권력자를 결정한 것은 ‘혁명’과 ‘건국’ 세대인 마오쩌둥·덩샤오핑이었다.
새로운 문제가 제기됐다. 덩샤오핑이 1997년에 사망했다. 덩샤오핑의 사전 지시대로 장쩌민은 2002년 최고권력을 후진타오에게 넘겼다. 후진타오도 10년동안 통치한 후 2012년에는 다음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문제는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더 정확히는 누가 후계자를 결정할 것인가였다.
최고권력자로서 후진타오가 5년을 통치한 후 후계자를 미리 결정해야 했던 2007년 심각한 대립 발생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이 현재 권력자이기 때문에 후계자를 결정하고 싶어했다. 반면 전임자로 여전히 생존해 막후 권력을 휘두르던 장쩌민은 자신도 후계자 결정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치열한 권력 암투가 벌어졌고 결국 장쩌민의 기반인 상하이방에서 지지한, 당시 상하이시 공산당 위원회 서기였던 시진핑이 다음 총서기로 결정됐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파 직계인 리커창을 국무원 총리에 세우는데 만족해야 했다.
시진핑이 최근 자신의 통치기를 ‘신시대’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 역사상 마오쩌둥·덩샤오핑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첫 중국 최고권력자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시진핑이 국민의 지지나 선거를 통해 권력자가 된 것은 아니다. 중국 공산당의 전통대로 전임자가 후임자를 결정했을 뿐이다.
공식적으로 중국도 선거라는 것을 한다. 물론 중국식 선거는 한국 등 다른 나라와 많이 다르다. 일반화해 ‘선거’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9,500여만명의 당원을 갖고 있는데 여기서 2,300여명의 전국대표대회(당대회) 대표가 나온다. 그리고 당대회 대표들이 350여명의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을, 다시 중앙위원회가 25명 정치국 위원과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을 뽑는다. 정치국 상무위원 7인이 중국 공산당은 물론 중국 국가의 최고 통치그룹이고 이 중에서 총서기가 최고 자리다.
당대회 대표 선거라고 해서 물론 우리처럼 출마 희망자가 나와서 지지를 호소하는 방식은 당연히 아니다. 그랬다면 민주국가일 테다. 그리고 공산당 독재가 유지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대회 대표 선거 출마자 명부는 미리 공산당 중앙에서 정한다. 내년 가을에 열릴 제20차 공산당 당대회 준비가 최근 시작됐는데 이는 공산당에서 당대회 대표 선거 출마자를 가리는 일에서 시작된다. 공산당 수뇌부는 ‘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능력도 있다’고 간주된 사람을 후보자에 올린다. 사실상 기존 공산당 권력이 다음 공산당 권력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이다.
선거 출마자에 대해서 당원들은 형식적인 투표를 하게 된다. 당연히 공산당에서 내놓은 후보자가 당선되고 되고 이들이 당대회 대표단을 구성한다.
당대회는 중앙위원을 선출하는 데 이도 물론 공산당에서 내놓은 후보들을 투표할 뿐이다. 정치국원과 정치국 상무위원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을 보면 중국에서 선거라는 것은 요식행위다. 결국은 공산당 중앙에서 후계자로 누구를 결정하느냐에만 관심이 쏠릴 뿐이다.
이런 선거에 동원되는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선거 자체에 관심이 없다. 결국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 수뇌부는 이러한 무관심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끊이 없이 선전을 한다. 그리고 공산당이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구호가 ‘위인민복무(爲人民服務)’다. 과거 전통시대의 ‘위민(爲民)사상’과 비슷하다.
처음에 제기된 문제가 여기서 해결을 봐야 한다. 과거 최고권력자인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의 지시를 지켜야 했다. 앞서 마오쩌둥의 종신독재에 신물이 난 덩샤오핑은 최고권력자의 10년 임기제를 규정했고 이를 자신이 추천한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즉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이런 규정을 어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처음으로 이런 문제에서 해방된 사람이다. 그는 덩샤오핑과 관계가 없다.
기존 권력자가 다음 권력자를 뽑는 중국적 ‘인민민주’ 상황에서 기존 권력자가 자신은 계속 자리에 있겠다면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덩샤오핑 시대에는 앞서 마오쩌둥의 개인독재와 문혁으로 인해 장기집권에 정서적인 반대가 심했다. 이미 그런 시대는 40여년이 지났고 거부감도 많이 없어졌다. 시진핑이 계속 하겠다고 해도 죽기살기로 반대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어차피 공산당 독재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임기 5년이 지난 지난 2017년 관례에 따른 후계자를 뽑지 않았다. 이는 10년을 집권한 후 개최되는 2022년 당대회에서도 그가 계속 자리에 남아 있겠다는 표시로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물론 또 다른 논란도 남아있다. 마오쩌둥식 개인독재에 신물이 난 덩샤오핑은 권력자 선정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권력을 공유하게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국 권력서열 1위인 총서기와 2위인 총리의 파벌을 달리하는 방식이다. 즉 넓은 의미의 상하이방·태자당인 시진핑과 공청단파인 리커창은 파벌에서 다르다.
내년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최고권력을 유지하며 총서기로 남아 있거나 아예 당 주석으로 개인 권력을 더 강화했을 때 2인자 총리 등을 다른 파벌에게 줄 것이냐다. 현재 시점에서 시진핑과 다른 파벌은 공청단파 후춘화가 대표적이다. 만약 총리도 시진핑파가 장악한다면 중국은 실제로 마오쩌둥 시대로 회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