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스포츠 문화

[책꽂이] 학벌주의가 낳은 '기이한 아수라장' 대치동의 민낯

■대치동: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조장훈 지음, 사계절 펴냄

정책·교육열 맞물려 학원가 번성

대입 정보 입소문에 학부모 몰려

집주인들 전월셋값 매년 올리고

세입자도 기존 보유 집 전세금↑

20년간 겪은 대치동 실태 낱낱이

'사교육 체계→공교육 이식' 주장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건물마다 학원을 알리는 간판으로 빽빽하다. /서울경제DB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건물마다 학원을 알리는 간판으로 빽빽하다. /서울경제DB




# 2020년 말,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에 심각한 전세난이 일었다. 이 지역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전세를 얻어 이사했다가 수능이 끝나면 다시 떠나는 일이 반복되는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하지만 이번엔 유독 전세 물건이 안 나왔다. 극심한 공급 부족에 래미안 대치 팰리스 1단지 84.97㎡의 경우 수능 전후 2개월 사이 전세가가 3억 원이나 뛰어 23억 원에 거래됐다고 알려졌다. 그나마 학원가 일대의 전세 물량은 동이 났다고 한다. 전세 물량이 없어진 것은 대치동 세입자 자녀들 중 대입 재수생이 늘면서 1년 더 전세살이를 선택한 집이 많았던 탓이다. 1년만 더 고생하면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학부모들은 그 가능성에 베팅했다. 실제로 2021학년도 수능 응시자 중 강남·서초 지역의 N수생 비율은 53%에 달했다. 이 지역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은 51.3%로, 절반 가까이가 재수를 택했다. 부동산 업계의 관계자들은 이제 전세 물량으로 재수생 증가를 예측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치동 아파트의 대표 격이라 할 은마아파트의 모습. 1980년 입주 이래 집값은 100배 이상 뛰었다. /서울경제DB대치동 아파트의 대표 격이라 할 은마아파트의 모습. 1980년 입주 이래 집값은 100배 이상 뛰었다. /서울경제DB


한국 사회에서 교육열은 부동산 시세에 극명한 영향을 끼치는 으뜸가는 요소다. 대치동은 말할 것도 없다. 신간 ‘대치동: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은 20여 년 간 대치동 사교육 시스템의 내부자로 있었던 저자가 이곳의 교육 문화와 부동산 실태를 고백한 책이다. 저자는 1990년대 논술 강사로 사교육 시장에 발을 디딘 후 대치동에서 학원을 운영하다가 “조금 더 늦기 전에, 덜 부끄러울 때” 이 바닥을 떠나려 마음먹고 작년 말 학원을 정리했다.

책은 대치동이 정부 정책과 교육열이 맞물려 지금의 사교육 1번지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역사를 되짚는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강남 개발로 고등학교들이 이 지역으로 이전하고, 그 학교 학생들이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 학부모들은 너도나도 강남으로 이사했다. 1990년대 들어 학원 관련 규제가 완화되고, 젊고 유능한 운동권 대학생들이 사교육에 뛰어들면서 대치동 학원가는 본격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다. 대치동에 빼곡히 들어선 학원들은 양적·질적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급 입시 정보가 대치동 일부 강사들 사이에서 유통된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책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각자의 목적을 실현하려고 치열하게 움직이고 긴밀히 공생하는 학원가의 생태계를 촘촘하게 소개한다. 지금의 시스템을 만든 학원장, 가장 먼저 마감되는 스타 강사인 ‘1타강사’, 그리고 장래 1타 강사를 꿈꾸는 개인사업자 강사, 학원 상담실장에서 일종의 마케터로 진화한 입시 컨설턴트 등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의 학원 분포 변화. /사진 제공=사계절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의 학원 분포 변화. /사진 제공=사계절



이와 맞물려 집값이 폭등하면서, 대치동으로 입성하는 사람들이 노리는 게 자녀의 학벌인지, 부동산 시세차익인지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해진 과정도 전한다. 저자는 “교육열 충만한 부모들이 강남으로 이주하며 자식이 아닌 자신들의 신분과 계급을 업그레이드했다”고 꼬집는다. 대치동 아파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은마아파트의 경우 1980년 1월 입주 당시 84㎡의 분양가는 2,339만 원이었지만 2001년에는 3억1,000만 원으로 10배 넘게 뛰었다. 2019년 말에는 입주 당시 대비 100배가 넘는 23억5,000만 원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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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에 집을 보유한 사람들은 이 동네에 학원가가 있는 한 전세 수요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결코 집을 팔지 않고 세를 놓는다. 그리고 주택 시세를 근거로 전월세 가격을 매년 올린다. 세입자는 그 가격을 맞춰주기 위해 수도권에 보유한 집의 전세가를 올리고, 이는 동네로 확산돼 결국 수도권 전체의 전세대란으로 이어진다. 대치동 집주인은 재건축을 허가 받기 위해 자기 집이 위험하고 불결하다는 판정을 받으려 노력한다. 저자의 말대로 “기이한 아수라장”이다.

2014년 이후 대치동 네 계층의 개략적 거주분포. /사진 제공=사계절출판사2014년 이후 대치동 네 계층의 개략적 거주분포. /사진 제공=사계절출판사


저자가 대치동 학부모들을 ‘대원족’, ‘연어족’, ‘대전족’, ‘원정족’ 등 네 가지 계층으로 분류한 것도 눈에 띈다. 대치동 원주민인 ‘대원족’의 2세가 대치동으로 돌아와 학부모가 되면 ‘연어족’이 된다. 대치동에서 전세로 살며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대전족’은 좁은 집에서 불편을 감수하며 교육에 절박하게 매달린다. 그리고 서울 비강남권, 멀게는 경기 남동부에서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원정족’이 있다. 대치동 학원가하면 떠오르는 밤 10시의 도로 혼잡을 초래하는 이들이다.

저자는 각자가 치열하게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동안 대치동 특유의 전문성과 효율성이 만들어졌고, 과도한 사교육과 사회적 불평등이란 폐해도 낳았다고 진단한다. “학벌주의로 인해 교육열이 뜨거워지고, 뜨거워진 교육열이 학벌주의를 담금질하는 악순환의 고리”라며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학벌주의에서 찾는다. 다만 “자신의 밥벌이가 사기 행각으로 비치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며 사교육에도 일정한 역할을 맡기자고 주장하는 점은 이채롭다. 그는 “안정적인 교육 서비스의 공급을 늘리고 공공의 차원에서 공급 가능한 대체재를 마련해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제안한다. 또한 대치동의 체계적 시스템을 공교육에 이식하는 등 사교육의 인적 자원을 공교육에 접목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1만8,000원.

밤 10시가 되면 대치동 학원가 도로는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원정족 학부모의 차량으로 혼잡해진다. /서울경제DB밤 10시가 되면 대치동 학원가 도로는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원정족 학부모의 차량으로 혼잡해진다. /서울경제DB




박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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