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하고 꼿꼿한 녹색 선인장 모양의 옷걸이 옆에 새알 모양의 하얀 쿠션 두 개를 양쪽으로 놓았다. 가구였으나 단숨에 남근적 상징물이 된 발칙한 작품의 제목은 ‘신(God)’. 이탈리아의 유명 가구브랜드 구프람(Gufram)의 대표 상품을 예술가그룹 ‘토일렛페이퍼(Toiletpaper)’가 짓궂게 배치했다. 이들이 이탈리아 생활용품 브랜드 셀레티(Seletti)와 함께 만든 거울은 양복 입은 남성들이 빨간 립스틱을 쥐고 서로 경쟁하듯 내민 손들이 가장자리를 채우고 있다. 블랙핑크 제니가 자신의 SNS에 올린 침실 사진에 등장해 ‘제니 거울’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이들 작품이 현대카드가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운영하는 전시공간 스토리지로 옮겨왔다. ‘토일렛페이퍼‘의 밀라노 본사 스튜디오를 실제와 거의 흡사하게 구현한 세계 최초의 전시다. 예술·디자인 애호가와 최신 유행에 민감한 MZ세대 사이에서는 ‘영웅적 인기’를 누리는 토일렛페이퍼인지라 주말에는 관람 대기 줄이 건물 밖까지 길게 늘어서는 인기 전시이기도 하다.
토일렛페이퍼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1)과 사진작가 피에르파올로 페라리(50)에 의해 2010년 결성됐다. 카텔란은 시가 25억원 상당의 황금 변기 ‘아메리카’로 미국 자본주의를 조롱하고, 바나나를 테이프로 벽에 붙여둔 개념미술 ‘코메디언’을 수억 원에 팔아치운 것으로 유명하다. 종교와 정치를 성역없이 풍자하는 악동이면서도 베니스비엔날레와 주요 미술관 전시에 자주 초청되는 중요한 현대미술가다. 페라리는 나이키·아우디·BMW·소니·필립스·삼성전자 등 세계적 브랜드와광고로 협업했다.
어느 날 화장실에 앉아있던 카텔란은 문득 ‘쉽게 쓰고 버리는 화장지처럼 누구나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잡지’를 떠올렸고 그 자리에서 ‘토일렛페이퍼’라는 이름까지 지었다. 1년에 두 번 발간된 토일렛페이퍼는 글과 광고 없이 이미지 만으로 구성됐고 세계적 화제를 몰고 다녔다. 냄비 폭발사고의 현장을 암시하는 엄청난 양의 스파게티가 뉴욕의 아파트를 뒤덮은 설치작품이 마이애미 바젤에 전시되고, 에펠탑 양쪽에 황금알을 배치한 설치작업을 파리 최대의 명품 백화점 갤러리 라파예트에 선보이는 등 ‘토일렛페이퍼’의 이미지는 현실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경계없이 활용됐다. 인체·음식·동물 등 그들이 즐겨다룬 소재는 오늘날 SNS에서 인기인 ‘인스타그래머블’한 이미지들을 예고했다.
전시장 입구는 새파란 벽, 발코니를 향한 립스틱 쥔 손들, 선명한 빨간색 문을 가진 밀라노 본사 외벽을 떠올리게 한다. 10년 이상 활동한 토일렛페이퍼가 본사 스튜디오를 공개한 것은 지난 9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처음이었다. 그 내부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인기비결로 꼽힌다. 토일렛페이퍼의 사무실에서 촬영한 CCTV 영상에서는 노는 듯이 일하며 상상초월의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그들의 일상이 공개됐다.
강렬한 색상, 고전과 현대미술을 접목한 독창적인 가구와 소품 등이 이루는 초현실적 풍경의 스튜디오를 지나 지하 3층으로 내려가면 토일렛페이퍼가 그간 선보인 이미지로 제작된 러그,조명,의자,테이블 등 100여점이 전시돼 있다. 물 속에 잠긴 여성이 얼굴과 손만 물 밖으로 내놓은 이미지가 대형 카페트로 전시 중인데, 이 작품은 수영장 벽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잘라놓은 새빨간 손톱 10개가 뉴욕 하이라인파크의 공공미술로도 선보이는 등 파격적 예술은 일상 속에 스밀 때 더 큰 의미를 확보했다.
이태원로 큰길 쪽으로는 대형 파사드 작업도 내걸었다. 객석에서 거꾸로 솟아오른 발레리나의 다리들인데 레드·그린·핑크 타이즈의 강렬한 색감이 삭막한 도심에 활력을 더한다. 몇몇의 맨다리가 유난히 더 추워보인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색깔없는 삶을 거부한다는 현대카드의 ‘노 컬러 노 라이프’ 캠페인과 협업한 작가들의 의도가 반영된 까닭이다. 전시는 내년 내년 2월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