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을 중심으로 올해가 우리나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투자의 원년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금 조달 및 투자가 급증한 것은 그룹 총수들이 친환경과 지속 가능 성장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기업 경영의 중심을 이동한 덕분이다. 현대차(005380)·SK·LG·롯데·포스코 등은 친환경차와 전기차 배터리, 수소 산업 육성을 위해 ESG 채권을 대규모로 발행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마련한 실탄에 자체 자금 등을 더해 투자를 늘려나가고 있다.
올해 ESG 채권 발행으로 가장 많은 현금을 확보한 곳은 현대차그룹이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지난 5월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사용 감축을 위한 ‘고고 챌린지’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현대차그룹은 지속 가능한 사회와 환경을 위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의 약속은 말로 그치지 않고 실제 투자로 이어졌다.
올해 수소에너지 대중화를 목표로 수소 비전 2040 전략을 발표한 현대차그룹은 ESG 채권 발행을 통해 확보한 7,000억 원을 향후 2년에 걸쳐 전기·수소차 개발에 투자해 탄소 배출을 줄인다는 방침이다. 현대모비스(012330) 역시 3,500억 원을 확보해 전기차 전용 부품 생산을 위한 공장 증축과 의왕 제2연구소의 연구개발(R&D)통합센터 신축에 나서기로 했다. 이와 함께 전동화 관련 법인을 설립해 향후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수요에도 대응할 계획인데, 현대차나 현대모비스 등이 채권 발행 자금뿐 아니라 각사별 여유 재원도 활용하기 때문에 전체 투자액은 채권 발행 조달 자금의 2~3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친환경과 전기차 배터리, 신약 분야 등 ESG 기반 사업의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는 LG화학(051910)은 2월 국내 개별 기업으로는 사상 최대인 8,200억 원 규모의 ESG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확보한 자금은 오는 2025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 감축 설비와 양극재 증설, 친환경 원료를 사용하는 생산 공정 건설 등에 투입된다. 아울러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시설 개선과 소아마비 백신 관련 증설 투자 등에도 자금을 집행하기로 했다.
재계 수장으로 ESG 경영 전도사인 최태원 회장이 이끄는 SK그룹도 올해 1조 4,480억 원을 ESG 채권으로 조달하며 관련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000660)는 4,400억 원 규모의 사회적 채권을 발행해 산업재해 예방 시설 투자에 800억 원을 사용하기로 했다. 남는 자금 3,600억 원은 취약 계층에 대한 인프라 서비스와 중소·중견기업 금융 지원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총 투자 예정 규모가 7,100억 원에 달해 SK 측이 3,500억 원을 자체 자금 등으로 부담하는 것이다.
SK그룹은 최근 인사에서 친환경 전환 전략을 총괄하는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켜 ESG 경영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 자회사들은 ‘카본 투 그린(Carbon to Green)’ 전략을 가속화하기 위해 친환경 관련 조직을 신설하고 인력을 늘리기로 했다.
올 10월 친환경 운동화를 신고 현장 경영 행보를 보이면서 큰 화제를 모은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도 계열사 전반에 걸쳐 ESG 투자를 대폭 늘려나가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는 올해 롯데케미칼과 롯데쇼핑·롯데물산·롯데렌탈·롯데글로벌로지스·롯데건설 등이 적게는 400억 원에서 최대 4,900억 원의 ESG 채권 발행에 나서 ESG 경영 체계가 가장 체계적으로 잡힌 그룹사로 롯데를 꼽기도 한다. 롯데그룹은 지주와 산업군(HQ), 계열사 간 커뮤니케이션 강화를 위해 최근 롯데지주(004990) ESG경영혁신실 산하에 사업지원팀을 신설했다. 특히 롯데케미칼은 ESG위원회를 만들어 국내 화학 회사 최초로 500억 원 규모의 ESG 전용 펀드를 조성하기도 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그룹 총수들이 ESG 경영 확대에 진심인 만큼 내년에는 한층 관련 투자가 증가하고 ESG 채권 발행 및 투자에 나서는 기업들도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