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35년 갈고 휘두른 '수묵화 큰언니', 김미순이 돌아왔다

김미순 30년 만의 국내 개인전

서초구 샘터화랑서 신작 선보여

1990년 호암,국립현대館 주목

일필휘지 팽팽한 긴장감 탁월해

김미순의 2021년작 '족적(Traces)03-1' /사진제공=샘터화랑김미순의 2021년작 '족적(Traces)03-1' /사진제공=샘터화랑




스미고 번지는 물감이 튀어오르고 폭발한다. 먹은 불에서 나온 것이니 수묵화의 ‘수묵(水墨)’은 이름에서부터 상반된 것의 공존이다. 기질이 다른 둘을 함께 쓰려면 재료 연구와 오랜 숙련이 필수다. 약 30년 만의 국내 개인전을 연 한국화가 김미순(62)의 작품들은 농익은 숙련자만이 휘두를 수 있는 붓질의 정수를 보여준다. ‘삶의 흔적을 그리다(Tracing Human Energy)’는 제목으로 최근작 16점을 엄선한 그의 개인전이 서울 서초구 샘터화랑에서 한창이다.



청먹 찍어 휘두른 붓질에 한 줌 재가 파르르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가 하면, 땅에 떨어진 굵은 빗방울 마냥 물기 머금은 먹이 각각의 기운으로 꿈틀거리며 군상(群像)을 이루기도 한다. 놀라운 점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일필휘지의 결과물이라는 것. 푹 찍어 쭉 뻗어낸 획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팽팽해 여백까지 장악한다는 사실이다.

김미순의 2021년작 '족적(Traces) 20-1' /사진제공=샘터화랑김미순의 2021년작 '족적(Traces) 20-1' /사진제공=샘터화랑


김미순의 2021년작 '족적(Traces) 12-1' /사진제공=샘터화랑김미순의 2021년작 '족적(Traces) 12-1' /사진제공=샘터화랑


13세 때 처음 붓을 쥔 화가는 “물을 잘 쓴다”는 칭찬을 곧잘 들었고, 일찍이 중국의 동양화 교과서인 ‘계자원’으로 기본기를 연마했다.

“먹색을 ‘우주의 색’이라고 합니다. 천자문의 첫 글자 검을 현(玄)의 현색이라고도 하는데, 그저 검기만 한 게 아니라 우주의 오만가지 다양한 색이 다 들어있는 오묘한 색이기에 ‘가물가물한 현색’이라고도 하죠. 옛 중국문헌에는 수묵화에 뛰어난 어떤 이가 먹색을 22가지로 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먹색은 창조와 생산의 색입니다.”

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



김미순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수묵에서 찾고자 1980년대 ‘수묵화운동’을 주도한 남천 송수남(1938~2013)의 제자로, 1984년 첫 개인전을 이후 ‘한국화 신세대’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등을 거치며 국제무대에 내놓을 우리 미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때 ‘현대수묵회’ 일원으로 활동했다. 호암갤러리의 수묵화 기획전에 참가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유망작가 발굴 프로그램인 ‘젊은 모색’에 선정된 1990년이 가장 바쁜 해였다. 당시 ‘젊은 모색 90’ 전시에는 오늘날 화단의 중추가 된 김선두·김호석·문봉선·서도호·정종미·조환·차대영·허진 등이 함께 했다. 하지만 김 작가는 이내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만 활동했기에 정작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그의 작품이 하나도 소장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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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


1992년 서울에서의 개인전을 끝으로 그가 화선지와 먹을 챙겨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과로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어릴 적에는 모작으로 연습에 몰두했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는 실경을 담고자 전국의 산을 누볐고, “더 살아있는 것”을 찾다 ‘사람 그리기’에 몰입했다. “내 삶의 의문은 선택하지 않은 채 태어난 생명에 관한 것이었고 그래서 생명에 대한 주제를 파고들었다”는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젊은 모색 90’ 전시 때 폭 20m가 넘는 대작에 숱한 사람을 그려 ‘영혼의 숲’을 완성했는데 그러다 과로하게 됐다”고 떠올렸다. 터전이 바뀌면 그림이 달라진다. 파리로 가 8년간 작업한 그는 먹색에서 다양성의 표현을 터득했고 그 먹색을 통해 한 개인의 역사를 보여주는 ‘르네상스’ 연작을 선보였다.

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


만혼으로 연을 맺은 남편이 외신기자인 까닭에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뉴욕에 있을 적엔 군중 속에 있으나 관계가 사라졌음을 자각해 ‘릴레이션’ 연작을 파고들었다. 인도로 이주했더니 사방에 죽음이 널렸건만 산 사람들은 마냥 행복한 모습에 충격과 자극을 받았다. 그렇게 탄생한 ‘족적(Traces)’ 연작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정체되지 않은 화풍을 얻었지만, 완벽한 일필휘지를 위한 치밀한 준비는 초심과 같다. 속되지 않은 순수한 먹색을 위해 먹을 갈고 윗물 따라내기를 반복하고, 그 먹색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붓을 찾아 빗자루부터 요리붓까지 실험한 끝에 요즘은 야자나무 뿌리를 다듬어 직접 붓을 만들어 쓴다. 물기 적은 칼칼한 붓질로, 획이 덩어리지지 않고 올올이 머리카락 같은 필선이 살아있는 화면을 구현한 최신작은 작가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붓이 힘없이 휘청이는 듯하지만 물을 머금으면 종이를 다 찢어내기에 붓질은 ‘날아다녀야’ 합니다. 그렇게 작업하는 순간, 화가인 나와 작품이 하나되는 순간의 에너지가 관람객에게 삶의 생동력으로 가 닿기를 바랍니다.”

전시는 21일까지 열린다. 이후 출품작 규모를 45점으로 늘려 내년 1월18일부터 3개월간은 여수국제엑스포 전시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서초구 샘터화랑에서 열린 김미순 개인전 전경.


글·사진=조상인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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