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만장자 투자자 레이 달리오가 최근 “코로나19 이후 또 다른 경제 충격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코로나19로 막대한 재정 부담을 진 와중에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 후폭풍으로 세계 경제가 ‘재앙’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기를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1년 전부터 예견했던 달리오이기에 한 번 더 곱씹게 된다.
우리 경제는 크고 작은 쇼크를 겪었지만 근근이 넘기며 플러스 성장을 이어왔다. 비틀린 정책 실험으로 호된 비판을 받은 문재인 정부도 지난해를 빼면 2~3%의 성장을 했다. 성장률이 뚝뚝 떨어져 위기론이 고개를 들어도 집권 세력은 반대 정파의 의도적 호들갑으로 치부하곤 했다. 현 여권은 “다른 나라보다 낫다”며 ‘비교 우위론’을 새로운 ‘국민 계몽 도구’로 꺼냈다. 나라 곳간을 풀어 허상으로 만든 ‘종이의 집’이어도 상관없다. ‘분식 성장’이 몰고 올 빚 폭탄은 미래 정부에 돌리면 그만이다.
“경제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다”라는 여당 대선 주자의 괴이한 말이 통용되는 현실이고 보면 지금의 비틀린 상황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외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집권 세력의 화려한 립서비스 뒤로 우리 경제가 치유하기 힘든 ‘진짜 위기’의 늪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이 묻은 위기의 화살이 동시다발로 몰려오는데도 우리는 애써 이를 모른 척하고 있다.
우리의 심장을 향해 가장 치명적 화살을 쏜 곳은 일본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8년 전 쏜 ‘세 개의 화살’은 자국 경기 부양을 위함이었기에 그나마 나았다. 기시다 후미오 현 총리가 날린 화살은 차원이 다르다. 대만 TSMC의 일본 공장에 대규모 보조금이 결정된 후 경제산업성 출신의 평론가 고가 시게아키가 주간지에 기고한 칼럼은 의미심장하다. ‘대만 기업에 휘둘리는 슬픈 일본’이라는 자괴감의 표현 뒤에 담긴 진심은 외국 기업에 ‘굴욕적 특혜’를 주더라도 반도체 왕국으로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는 다짐이요, 외침일 것이다. 100년 역사 히타치의 해외 인수합병(M&A)과 비주력 사업 매각은 살기 위해 변신하는 일본 기업의 상징적 몸부림이다. 20명이 넘는 노벨상·필즈상 수상자를 중심으로 한 일본 과학기술력이 제조업의 생존 몸짓과 결합해 1980년대 영광을 되찾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두 번째 위기의 화살인 ‘주력 산업의 노쇠화’는 일본의 부활 때문이라도 더 심각하다. 우리는 미중 갈등에 따른 당장의 유탄에 집착하지만 바라볼 지점은 따로 있다. 미국의 타깃은 중국의 빅테크지만 결국 피해를 입을 곳은 우리 주력 기업들이다. 미국은 중국의 숨통을 죄려 한국·대만·일본 등의 기업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다. ‘동맹’을 말하지만 실상 미국 제조업 부활을 위한 ‘도우미’일 뿐이다. 그렇다고 중국의 기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칭화유니에서 보듯 무너졌다가 좀비처럼 살아나 힘을 기르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 10년 동안 새로 키워낸 주력 산업이 배터리 정도인데 벌써 중국에 추월당했다. 반도체·자동차가 버티고 있지만 미국·중국에 일본까지 살아나 우리의 목줄을 한꺼번에 겨눌 때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다 못해 호도한다. 세 번째 화살은 바로 리더십의 위기다. 긴축의 파고가 거세고 가계·기업·정부의 빚 폭탄이 5,000조 원을 넘어도 ‘유능한’ 관료들은 어떤 식이든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강대국발 패권의 삭풍(朔風)은 국가 지도자가 국민 전체의 힘을 끌어모아도 이겨내기 힘들다. 그런데도 대선 후보들은 위기의 핵심은 외면한 채 ‘경제 대통령’과 ‘성장’을 부르짖고 있다.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종이의 집’에서는 스페인 중앙은행 지하에 겹겹이 보관된 금이 강도 일당에게 맥없이 당해 황동으로 뒤바뀐다. 수십 년 쌓아온 우리의 황금 자산이 눈앞의 독화살조차 보지 못하는 국가 지도자의 무능과 탐욕으로 가득한 내부의 적들 때문에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