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24일 보수·진보 진영의 옛 거물 정치인들의 사법적 족쇄를 잇따라 풀기로 하면서 3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대선 판도에도 후폭풍이 불가피해 보인다. 옛 보수의 아이콘 박근혜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되고, 진보 진영의 간판 주자였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복권,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의 가석방 결정이 이뤄지면서 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정국을 뒤흔들 수도 있게 됐다.
앞서 지난 20일 진행된 법무부 사면심사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는 박 전 대통령을 사면 대상자에 포함할지 여부에 대해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깜작 사면 결정이 발표되면서 그 배경과 영향을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 사면·복권·가석방을 결단한 이면에는 진보 진영 결집·확장과 보수 진영의 혼란과 분열 가능성을 감안한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정치권에서 회자되고 있다. 대선 판세 등에 대한 고려 없이는 법무부 등의 반대와 국민들의 찬반양론을 무릅쓰고 이번 깜짝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사면 결정 발표 직후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이 참모들이나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상의하지 않고 홀로 사면을 결정했다는 취지로 발언을 했다. 이 관계자는 “참모들 간 토론은 없었다. 이 문제는 익히 우리 사회에서 이슈화된 지 오래됐고 여러 입장을 이미 많이 들으셨기 때문에 참모들 간의 토론을 통해서 결정할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하셨을 것”이라며 “사면에 대한 생각을 당에 물어본 적은 없다. 특정 정치인과도 협의한 바 없다”고 설명했다. 권혁기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보부단장도 브리핑에서 “인대 파열 수술을 받은 송영길 당 대표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도 만난 적이 없고 통화한 내역도 없다”고 전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중도 확장을 꾀하는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총대를 멘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하필 대선을 고작 75일 남겨 둔 상황에서 뇌물·알선수재·알선수뢰·배임·횡령 등 ‘5대 중대 부패 범죄’의 사면은 배제하겠다고 자신의 공약을 깨면서까지 문 대통령이 이를 강행한 데는 후임에 도전하는 여당 대선 후보에 대한 고려가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 4월 오세훈·박형준 시장 청와대 초청 자리, 5월 취임 4주년 기자회견 등에서 전직 대통령 사면 조건으로 ‘국민 공감대’를 누차 강조해왔다. 반면 가석방에 그친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과 달리 박 전 대통령 사면 여론은 각종 조사에서 최근까지 절반을 거의 넘긴 적이 없었다. 청와대도 “사면을 검토한 적이 없다”는 공식 입장을 줄곧 유지해왔다.
문 대통령은 이번 사면 결정 직후 “우리는 지난 시대의 아픔을 딛고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며 “이제 과거에 매몰돼 서로 다투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힘을 합쳐야 할 때”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이번 사면이 생각의 차이나 찬반을 넘어 통합과 화합, 새 시대 개막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며 “사면에 반대하는 분들의 넓은 이해와 해량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 사면이 순수하게 그의 건강 문제 때문에 이뤄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면으로 박 전 대통령 건강 악화에 따른 정치적 파장을 역으로 차단했다는 시각이다. 법조계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최근 지병으로 다시 입원을 한 상황에서 형 집행정지도 신청하지 않자 21일 사면심사위가 사면 기조로 선회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도 “박 전 대통령의 건강 상태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경우 한 전 총리와 이 전 의원 등 다른 정치인들에 대한 복권·가석방 조치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국민’이 아니라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이제 괜찮다’는 ‘지지자’들의 공감대를 의식했다는 평가도 나오는 이유다.
여야 역시 이번 사면 결정이 대선 여론에 미칠 여파에 촉각을 기울였다. 특히 ‘국정농단 특별검사’ 수사팀장을 맡았던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이제 막 세상에 나올 박 전 대통령과의 악연을 풀어낼 수 있는가가 최대 화두가 됐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2012년 대선 당시에도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의혹 특별수사팀장으로 활동하다가 검찰 수뇌부의 수사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하고 사실상 좌천된 경력이 있다.
자칫 두 사람의 악연이 환기돼 대구·경북(TK) 등 전통적 지지층이 이탈한다면 이는 윤 후보에게 큰 악재다. 박 전 대통령이 출소 이후 윤 후보에게 자칫 쓴소리를 할 경우 강경 보수층이 따로 결집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야권 내부에서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가 분열할 수 있는 상황도 위험 요인이다.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은 소셜미디어에서 “두 전직 대통령을 또 갈라치기 사면을 해서 반대 진영 분열을 획책하는 것은 참으로 교활한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이번 사면으로 중도층과 TK 공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분위기다. 이 후보는 조승래 선대위 대변인을 통해 “국민 통합을 위한 문 대통령의 고뇌를 이해하고 어려운 결정을 존중한다”며 “지금이라도 국정 농단의 피해자인 국민에게 박 전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는 “강력한 유감을 표한다”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중대한 사면에 최소한의 국민적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국민 통합이라는 말은 함부로 꺼내지 않길 바란다”고 반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