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연구기관은 창의적, 개인 주도형 연구를 강조하면서도 PBS(연구 과제 수주 기반 예산 시스템)로 인해 국가 임무형 연구개발(R&D)에 주력하지도 못 하고 기술 사업화, 특허 수익화에도 소극적입니다.” (천세창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만·차관급)
미국과 중국 간 기술 패권 전쟁을 벌이는 팍스 테크니카 시대에 출연연 같은 국가 연구소들의 역할 확대를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공공 연구소답게 탄소 중립과 감염병 대처, 우주 등의 전략 기술 개발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임팩트 있는 연구를 통해 기업에 대한 혁신 기술 이전과 자체 창업 등 기술 사업화로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 추락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도 주요 과제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현재의 주요 10개국(G10)을 넘어 주요 5개국(G5)으로 도약하느냐, 중견국의 추격을 허용해 주저앉느냐의 절체절명의 기로에 있기 때문이다. 특허청 차장 출신의 천세창 옴부즈만은 “G5 웅비의 토대를 닦느냐, 아니면 자칫 미국·중국의 기술 하청 국가 수준으로 전락하느냐의 엄중한 시기”라며 “차기 정부에서는 대학과 출연연의 환골탈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 과학기술계에서는 출연연 연구자들이 연구비의 많고 적음을 떠나 정부나 공공기관 등에서 나온 연구 과제를 수주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우려가 많다. 전략 기술 확보와 국가적인 어젠다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25개 출연연의 경우 기관에 따라 비중에 차이가 있지만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받는 것과 PBS에 따라 과제 수주를 통해 연구비를 충당하는 것이 각각 절반가량 된다. 권오경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은 “연구자가 외부 과제를 수주해 연구비를 충당하느라 단기 성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며 “차기 정부에서는 산학연 협력, 창의·도전적 연구, 전략 기술과 장기 연구 확충을 위해 PBS 제도를 혁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을 추격자형에서 선도자형으로 탈바꿈하는 데 출연연이 주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미국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도전적·모험적 연구를 통해 인터넷, 위성항법장치(GPS), 메신저리보핵산(mRNA) 기술 등의 단초를 마련한 것처럼 우리 출연연이 파괴적 혁신을 불러올 연구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정부 R&D 예산의 20% 이상을 도전적 선도형 연구에 투자하고 관리 시스템을 정비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정부와 산학연의 공동 융합 연구 체제 구축에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시 말해 출연연을 전략 기술 육성과 산학연 융합의 플랫폼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상욱 과학기술과미래연구센터장은 “현재 출연연 구조는 학제별·산업별 조직으로 문제 해결 중심의 조직이 아니다”라며 “거대과학, 기초연구 스케일업, 원천 기술 개발, 산학연 네트워킹 등 공공성이 큰 고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차기 정부에서는 출연연 간 장벽 허물기와 융합 연구 활성화에 나서고 출연연이 산학연 협력의 허브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25개 출연연을 관장하는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이사장은 “출연연 간의 융합 연구는 물론 국방 분야 연구기관과의 융합 연구도 대폭 확대하려 한다”며 “미래 성장 동력을 확충하기 위한 기술 사업화와 국민 삶의 질 개선에도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출연연이 담을 쌓고 각자도생하는 경향이 있고 단기 성과에 매몰돼 도전적 연구 문화가 부족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렇게 출연연이 국가 R&D의 중추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과기정통부가 갖고 있는 출연연의 예산·인사권을 NST에 상당 부분 넘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출연연의 자율성·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을 NST 이사장이 겸임하자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렇게 될 경우 출연연의 일부 통폐합과 함께 관리·감독 권한을 과기정통부에서 국무총리실로 격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분석된다. 천 옴부즈만은 “심지어 대학·공공연 중에는 특허의 등록 유지 또는 포기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정부에 선별해달라는 곳도 있다”며 “대학과 연구기관이 자신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고 책임지는 리더십이 구축돼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