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올해 중반께 시행될 예정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2006년 이미 도입된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은 경우 사전에 정해놓은 방법으로 퇴직연금을 자동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다. 안정적인 노후를 책임져야 할 퇴직연금이 근로자의 무관심으로 인해 대부분 예금과 같은 저금리 원리금 보장 상품으로 운용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한 것이다.
개정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디폴트옵션은 크게 △펀드 △원리금 보장형 △펀드와 원리금 보장형으로 구성될 수 있다. 이 중 펀드는 타깃데이트펀드(TDF), 자산 배분형 펀드, 스테이블 밸류 펀드(손실 가능성을 최소화한 단기 금융 상품), 사회간접자본(SOC) 펀드 및 기타 시행령에서 정하는 펀드만 가능하다. 특히 펀드로만 디폴트옵션을 구성할 경우 TDF 또는 자산 배분형 펀드가 포함돼야 한다. 디폴트옵션의 근본적인 역할이 적정한 위험하에서 적정한 수익률을 창출해 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대표적 DC형 퇴직연금제도인 401(k)를 도입한 기업의 대다수가 TDF를 디폴트옵션으로 지정하고 있다. 미국 TDF 시장은 2021년 3분기 기준 1,741억 달러(약 2,000조 원) 규모로 급성장하고 있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운용관리기관이 구성하고 고용노동부 심의 및 승인을 거쳐 사용자에게 제시된다. 해당 디폴트옵션이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얻으면 사업장의 DC형 퇴직연금 규약에 반영돼 실질적으로 운용된다. 신규 DC 가입 법인은 시행 후 즉시 규약에 반영해야 하며 기존 DC 가입 법인은 1년간의 유예가 있다.
근로자가 기존 운용 상품의 만기일이나 DC형 퇴직연금 최초 가입일로부터 스스로 운용 방법을 선정하지 않은 상태로 4주가 경과하면 퇴직연금이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될 것이라는 내용이 통지된다. 통지 후에도 별도의 운용 지시 없이 2주가 지나면 디폴트옵션이 적용된다. 근로자는 가입 시나 DC규약 변경 시에 사전에 규약상 열거돼 있는 디폴트옵션 중 하나를 선정해야 한다. 선정한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되더라도 언제든지 다른 상품으로 운용 지시를 할 수 있고 직접 운용 중에도 언제든지 디폴트옵션으로 전환할 수 있다. IRP 가입자도 동일하다.
큰 전환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 있다. 디폴트옵션으로 원리금 보장형 100%를 지정할 수 있다는 점은 수익률 제고를 도모한다는 제도의 취지와 맞지 않는 데가 있다. 추후 보완돼야 할 부분이라는 것은 틀림없지만 제도 도입만으로도 시장이 변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장기 자금이라는 특성을 지닌 연금자산은 적립식 투자 및 분산투자와 결합될 때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다. 디폴트옵션 의사결정자들은 이 점을 인지하고 TDF와 자산 배분형 펀드를 디폴트옵션으로 선정해 근로자들의 노후 자산 형성에 도움을 줄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디폴트옵션 도입이 국내 근로자들의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고 노후 자산을 형성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