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부터 업종과 근무 연수 등 조건만 충족되면 모든 노동자의 근골격계 질환을 산업 재해로 추정한다. 자동차·조선·타이어 업계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에 이어 근골격계 직업병 산재로 인한 부담을 떠안게 됐다.
14일 고용노동부와 재계에 따르면 다음 달부터 정부가 고시한 근골격계 질환 산재 인정 기준 개정안이 효력을 발휘한다. 개정안은 특정 업종과 직종에서 일정 근무 기간을 채운 근무자가 고용부가 정한 상병을 산재로 신청할 경우 이를 산재로 추정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가령 자동차 업계에서 2년 이상 부품 조립을 한 노동자가 손목 터널증후군(수근관증후군)을 산재로 신청하면 이를 산재로 추정한다. 급식 조리원, 타이어 검사원, 조선 용접공으로 1년 이상 근무하다가 테니스엘보(팔꿈치 외상과염) 증상이 나타날 경우에도 산재가 추정된다.
조선·철강·타이어 업계는 개정안 적용을 받는 노동자를 전체의 약 70~80%로 추산하고 있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은 이날 경총이 개최한 ‘근골격계질병 산재 인정기준 개선 방향’ 토론회에서 “해당 업종 근로자 70~80%가 적용돼 심각한 현장 혼란과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신청 건수 증가로 처리 기간 단축 효과도 미미할 것”이라고 밝혔다.
고용부는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더라도 산재 인정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산재가 인정되는 근골격계 질환을 2020년 통계에서 산재 승인율이 80% 이상인 질환으로 한정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이 같은 기준이 업무와 산재 간 인과 관계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반발이 나온다. 특정 업무가 산재를 유발할 것이라고 추정할 수는 있어도 그 업무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가령 덴마크는 요추 추간판 탈출증(허리 디스크)으로 인한 산재를 추정하려면 노동자가 하루 8~10톤의 중량을 들고 1회 취급한 중량물의 최소 무게가 남자는 50㎏, 여자는 35㎏ 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산재 추정의 원칙이 오히려 산재 예방 유인을 떨어트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착용 로봇 등으로 업무 환경을 적극 개선한 기업과 열악한 작업 환경을 고수한 기업이 똑같은 산재 승인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동필 동의대 교수는 “고용부 고시 개정은 기업의 안전 보건 개선과 투자 확대 동기 부여를 떨어뜨리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직종과 업종 간 형평성 문제도 지적된다. 기존에 산재 신청을 많이 한 업종과 직종을 기준으로 산재 추정 기준을 마련하다 보니 똑같은 병을 앓더라도 산재 신청을 하지 않은 업종과 직종은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김수근 용인 강남병원 작업환경의학 전문의는 “기존 산재 신청 집단을 대상으로 기준을 마련한 결과 특정 업종·직종의 산재 승인이 더욱 용이하게 돼 불합리한 차별이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중대재해법 시행으로 산재 리스크 관리에 골머리를 앓던 자동차·조선·타이어 업계는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개정안 통과 시 산재 신청 및 승인 건수가 급증하고 기업이 추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재 승인 건수가 늘면 보험료율이 올라가고 산재 요시찰 기업이 되는 만큼 중대재해법에 이어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