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현지 시간) 세계 최대 전자·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22’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컨벤션센터(LVCC) 노스홀. 글로벌 완성차 제조 업체 아우디의 한 관계자가 국내 수면 테크 기업 에이슬립의 전시장을 찾았다. 에이슬립은 뇌파 등 생체 신호에 의지하지 않고 숨소리만으로도 수면 단계를 분석할 수 있는 기술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아우디 측은 기술을 참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협업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동헌 에이슬립 대표는 “탑승자의 수면 패턴을 분석해 이를 차량 내 조명 시스템에 활용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다”며 “차량 제조사의 협업은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라 신선하게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자율주행 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차량에서 보내는 시간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더 이상 이동을 위해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부터 식사·업무·수면까지 확장이 가능한 데이터로서 가치를 재평가받고 있다. 이에 10여 년 전 모바일 개화기에 인프라에 해당하는 모바일 운영체제를 구축, 수십억 명의 이용자 데이터를 확보했던 빅테크들도 재빠르게 커넥티드카(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모빌리티) 주도권 싸움에 뛰어들고 있다. 미래 모빌리티는 스마트폰을 뛰어넘을 정도로 방대한 데이터가 모이는 플랫폼으로 진화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차량은 한 번 구입하면 최소 5년가량을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선점 효과가 중요하다. 미국 차량 구매 사이트 트루카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차량의 평균수명은 12년에 달했다.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구글로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완성차 제조사와의 협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최대 완성차 업체 포드가 오는 2023년부터 자사 제조 차량에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다고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구글 지도를 이용하려고 하면 유튜브, 구글 어시스턴트 등 나머지 서비스도 구매해야 하는 일괄계약 형태로 계약 기간은 6년이다. 포드가 2020년 전 세계 판매량이 420만 대에 달하는 만큼 구글은 이번 계약을 통해 최대 3억 명에 이르는 이용자를 확보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은 ‘프로젝트 타이탄’ 이름하에 자체 자율주행차를 개발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에 더해 애플의 모바일 운영체제 iOS, 맥 운영체제 몬터레이(Monterey)에 이어 자동차용 운영체제를 선보일 것이라는 관측이 강하다. 특히 애플은 심리스한 연결성에 강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이폰부터 애플워치·맥에 이어 차량에 이르는 생태계를 강화해 이용자 록인 효과를 극대화할 것으로 보인다. 기술 리서치 회사 ABI의 제임스 호슨 애널리스트는 “애플은 다른 업체들에 자신의 브랜드를 맡기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커넥티드카 시장도 처음부터 끝까지 애플 자체의 경험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짚었다.
모바일 시대에는 서드파티 애플리케이션으로 취급됐던 회사들의 행보도 눈에 띈다. 2014년 구글과 애플에 대항하기 위해 자체 스마트폰 모델 ‘파이어폰’을 내놓았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본 아마존이 대표적이다. BMW·GM을 비롯해 아우디·지프 등에 아마존의 음성 비서인 알렉사 서비스의 탑재를 확대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자상거래 서비스 아마존은 물론 홀푸드·아마존고 등 오프라인 쇼핑과의 시너지를 모색하고 있다. 다만 알렉사 서비스만으로는 구글과의 경쟁에서 승산이 떨어지기 때문에 자체 하드웨어 확보에도 열심이다.
가전·콘텐츠 업체 소니도 이달 초 모빌리티 사업 진출을 선언하며 자체 전기차에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소니픽처스 오리지널 영화·드라마 시리즈 등으로 축적한 차량 내 엔터테인먼트를 강점으로 내세웠다. 소니처럼 콘텐츠 경쟁력을 가지고 모빌리티 사업에 진출하는 사례도 생기면서 모바일 시대의 우위를 가져가려는 빅테크와 다양한 분야 후발 주자들의 경쟁 구도가 다양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보기술(IT) 공익 재단 퍼블릭날리지의 샬럿 슬레이만 경쟁 정책 총괄은 “차량이 ‘제2의 사무실’에 비유될 정도로 많은 데이터가 모이고 있다”며 “차량의 사용 주기가 스마트폰보다 훨씬 길기 때문에 한 번 경쟁 우위가 생기면 돌이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