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정보통신기술(ICT) 기업들이 각 사별로 주력으로 삼을 기술에 적합한 최고기술책임자(CTO)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글로벌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메타버스·대체불가토큰(NFT)·증강현실(AR)·6세대(6G) 등 분야의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사업 구조 혁신이 절실하고 이를 위해서는 성장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에 따라 어제까지만 해도 라이벌 회사에 몸담았던 CTO를 파격적인 조건에 영입하거나 아예 다른 업종의 전문가들을 데려오기도 할 정도로 ‘총성 없는 CTO 영입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주력 사업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메타버스 등 AR로 전환한 ‘메타(옛 페이스북)’는 지난해 9월 하드웨어 사업부를 맡아왔던 앤드루 보즈워스를 새 CTO로 선임했다. 사명을 페이스북에서 메타로 변경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CTO 교체 발표 이후 한 달가량이 지난 10월이다. 메타의 신임 CTO는 가상현실(VR) 기기인 ‘오큘러스’ 관련 업무를 담당해왔던 인물로 이후 애플 등에서 AR 개발 인력을 대거 영입했다. 업계 관계자는 “메타가 CTO를 먼저 교체한 후에 사명을 바꾸고 관련 인재 영입에 나선 것은 기술 혁신 중심축이 CTO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CTO의 네임밸류가 개발 인력의 연쇄 이동으로도 이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도 최근 애플에서 지난 2년 동안 자체 시스템온칩(SoC) ‘M1 시리즈’ 설계를 담당했던 마이크 필리포를 CTO로 영입했다. 그는 MS의 클라우드 서비스 ‘애저’ 구동을 위한 서버용 프로세서 설계를 담당할 예정이다. 경쟁사인 구글과 아마존이 자체 칩 개발에 나서자 MS도 애저 클라우드 서버용 칩을 개발에 나선 것이다. 인텔 역시 이에 맞서 이달 초 자사 출신으로 애플의 칩 생산 총괄을 맡았던 제프 윌콕스를 재영입했다. 그는 디자인 엔지니어링 그룹 CTO로 고객용 SoC 설계를 맡게 됐다. 애플은 메타·MS·인텔 등으로 CTO급 인재가 잇달아 유출되자 최근 이례적으로 최대 18만 달러(약 2억 1,400만 원) 규모의 자사주를 4년에 걸쳐 개발 인력에 지급하기로 했다.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테크 기업들의 기술 중심 경영은 매년 강화되고 있다. IBM기업가치연구소가 글로벌 50개국 3,000명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조사해 최근 발표한 ‘2021 CEO 스터디’에 따르면 CEO의 39%가 조직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C레벨 임원으로 CTO와 최고정보관리책임자(CIO)를 꼽았다. 최고재무책임자(CFO·57%), 최고운영책임자(COO·56%)에 이어 세 번째다. IBM기업가치연구소가 지난 2003년 첫 보고서를 발간한 후 CTO와 CIO가 3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IBM기업가치연구소는 2003년 보고서 발간 이후 18년 만에 처음으로 CTO 보고서를 별도로 발간하기도 했다. IBM은 “CTO는 기술이 기업 운영에 어떻게 기여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이해해야 한다”며 “새로운 기술 혁신이 새로운 기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도 빨리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국내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앞으로 주력할 분야의 맞춤형 CTO를 잇달아 선임하고 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기술 총괄 수장에 앉혀 기술 혁신 속도를 높여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전략이다. SK텔레콤(017670)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CTO와 메타버스 수장을 동시에 교체했다. 신임 CTO인 이상호 커머스사업부장 겸 11번가 대표는 개발자 출신으로 검색 로봇과 인공지능(AI), 자연어·음성 처리 전문가다. NHN(181710)과 카카오(035720) 등에서 검색 및 음성 인식 관련 서비스를 개발했고 2016년 SK플래닛 CTO로 합류해 SK텔레콤의 AI 스피커 ‘누구’ 서비스 개발을 주도했다. 양맹석 신임 메타버스 CO장 역시 SK텔레콤의 미래 사업 중 하나인 메타버스 플랫폼인 이프랜드 마케팅을 맡아왔다. SK텔레콤 관계자는 “기존에는 자동차·반도체·정보기술(IT) 등 사업 영역이 명확했지만 최근에는 기술 영역이 세분화되면서 그에 맞는 CTO 수요가 많아지고 그만큼 이동도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066570)도 지난해 말 4년 만에 CTO를 교체했다. 김병훈 신임 LG전자 CTO는 세계 최대 전기·전자공학 기술 전문가 모임인 미국 전기전자공학회(IEEE)에서 통신 분야 역량과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IEEE 펠로로도 선정된 통신 분야 전문가다. 하드웨어 중심에서 벗어나 통신을 접목한 신기술 개발을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LG전자 관계자는 “통신 분야 전문가인 김 신임 CTO는 앞으로 6G, AR·VR, 메타버스, AI 등 차세대 원천 기술 준비에 전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력이 기업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타트업도 CTO 영입이 활발하다. ‘의료 슈퍼앱’ 구축에 나서고 있는 원격 의료 플랫폼 닥터나우는 쿠팡·카카오 출신의 이현석 CTO를 영입했다. 플랫폼 전문가인 만큼 플랫폼 서비스 기능 강화와 사용자 편의 증대에 나설 계획이다. 쏘카는 류석문 전 라이엇게임즈코리아 개발이사를 CTO로 신규 영입했다. 류 신임 CTO는 LG전자에서 소프트웨어(SW) 개발자로 시작해 NHN에서 지도지역서비스 개발랩장 등을 거쳤다. 류 CTO는 모빌리티 기술과 이동 데이터를 활용한 다양한 기술을 조화롭게 서비스화하는 데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이성엽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들이 디지털 혁신을 전략적 우선 순위에 두면서 CTO는 기업 내 핵심 임원으로 부상했다”며 “각 산업·기업별로 AI·클라우드 등 범용화된 신기술을 최적화해 적용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한 CTO의 역할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