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 ‘산업의 쌀’ 반도체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격렬하다. 세계 주요 국가들은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아이템으로 반도체를 낙점하고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한국은 일부 기업이 올린 성과에 정부와 국회가 기대는 모습이다.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기업을 뒷받침하는 정부와 국회·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이 필수적이지만 현재 한국은 이들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3무(無)’ 상황이다.
최근 수출 한국호(號)는 반도체 덕분에 연일 순항하고 있다.
3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반도체는 지난 1월 계절적 비수기임에도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4.2% 많은 108억 2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이는 역대 1월 기준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돌파한 기록이다. 또 9개월 연속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열세를 보이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수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33.0%나 크게 뛰며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급등한 원유·가스 가격 탓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4년 만에 무역적자가 났지만 이례적인 성과를 낸 반도체가 없었다면 적자 폭은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이처럼 반도체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날로 커져가고 있지만 정부와 국회는 소극적 지원책만 내놓고 있다. 오는 6월부터 시행 예정인 첨단 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반도체특별법)도 서둘러 만들어졌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기술 인력 양성의 최대 걸림돌인 대학 정원 문제를 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설비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도 업계의 기대보다 대폭 축소됐기 때문이다. 시설 투자는 업계가 최소 25~50%의 세제 혜택을 요청했으나 기업 규모에 따라 차등적으로 6~16%의 세액공제를 받는 수준에 그쳤다.
그렇다면 반도체 자급론을 꺼내든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지난해 미국 상원에서 통과돼 하원에서 논의 중인 ‘반도체생산촉진법(CHIPs for America Act)’은 오는 2024년까지 미국 내에서 반도체 제조와 관련한 시설 투자를 할 경우 최대 40%에 해당하는 금액에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 결과 삼성전자와 TSMC·인텔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앞다퉈 미국에 공장을 증설하거나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미국 정부 주요 인사들이 “반도체는 인프라, 공격적 투자가 필요(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반도체는 석유보다 중요하다(돈 그레이브스 미국 상무부 부장관)”고 발언한 만큼 더 강력한 지원책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중국은 15년 이상 사업을 해온 반도체 제조 기업이 고도화 공정을 도입할 경우 최대 10년 동안 법인세에 파격 혜택을 준다. 28~65나노미터 반도체 공정을 도입하면 5년간 법인세를 면제하고 그다음 5년간은 법인세율을 50% 낮춰주는 특별 혜택을 제공한다. 유럽연합(EU)과 일본·대만 등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자국 반도체 산업의 부흥을 위해 다양한 당근을 꺼내든 상태다.
인력 양성도 정부나 국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업계는 국회에서 반도체특별법을 만들 때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에 가해진 정원 제한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입법에 참여한 비수도권 의원들의 입김에 수도권정비계획법에 기반한 대학 정원 제한은 금기로 남았다. 대신 구색 맞추기로 계약학과나 특성화대학 설치 및 운영을 지원한다는 수준의 내용만 법에 담겼을 뿐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특별법에는 제일 중요한 인력 양성 방안이 빠졌다”며 “대만은 전공자만 1년에 1만 명 넘게 배출하며 2000명 수준인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인다. 각 대학에 반도체학부를 신설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지만 규제로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미래 수요와 업황을 예측한 기업들이 서둘러 생산 라인을 늘리려 해도 3무 상황에서 지역 주민의 반발까지 겹쳐 오도 가도 못하기도 한다. 2019년 2월 경기도 용인시에 반도체클러스터를 구축할 목표를 세우고 투자의향서를 제출한 SK하이닉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앞서 SK하이닉스는 2032년까지 120조 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 4곳을 짓겠다고 2019년 2월 대대적으로 발표했지만 3년째 삽조차 뜨지 못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용인 반도체클러스터를 수도권공장총량제의 예외 사례로 인정하고 인근 지자체 간 협의를 거치는 데 2년여가 흘렀다. 터전을 두고 떠나야 하는 지역 주민을 설득하는 데도 시간이 걸려 착공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결국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대안 찾기에 나섰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용인 반도체클러스터 구축에 차질이 빚어진다고 판단되면 다른 스페이스(공간) 확보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고, 실제로 지금 고민하고 있다”고 최근 열린 콘퍼런스콜에서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