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지도자의 경제 철학과 어우러진 ‘~노믹스(nomics)’ 중 가장 친숙한 단어는 ‘레이거노믹스’일 것이다.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집권 초 종래의 케인스 경제학으로는 경기 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반된 스태그플레이션을 치유할 수 없다고 보고 감세와 규제 완화를 뼈대로 한 ‘공급주의 경제학’을 펼쳤다. 최근에는 아베 신조 일본 전 총리가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 개의 화살(양적 완화, 재정 지출 확대, 규제 완화)’을 무기로 꺼낸 ‘아베노믹스’가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통령의 이름에 ‘노믹스’를 붙여왔지만 어색하고 때론 억지스럽다. 환란을 이겨내고 경제 체질 개선에 나선 김대중 전 대통령의 ‘DJ노믹스’가 돋보이지만 카드 발급을 통한 인위적 부양은 심각한 흠집을 남겼다. 감세·친기업을 표방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MB노믹스’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를 벗어나는 데 일정 부분 효과를 보았어도 광우병 파동에 묻혀 흐지부지됐다. 문재인 정부는 노믹스는커녕 임기 내내 경제정책을 비틀어진 이념의 실험 도구로 삼았다. ‘한강의 기적’ 이후 제대로 된 노믹스 없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을 지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국운은 영원할 수 없다. 우리 경제가 국민과 기업의 열정으로 커왔지만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보는 게 옳다. 정부는 지난해 4% 성장을 낯이 간지러운 줄 모르고 자랑하지만 세금과 민간 기업의 ‘나 홀로 싸움’이 없었다면 어떠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나마 곶감 빼 먹듯 하던 나라 곳간이 비어가고, 수십 년 우리를 먹여 살린 효자 기업들의 체력은 바닥나고 있다. 대신 악몽 같은 재정과 무역의 ‘쌍둥이 적자’가 아른거린다.
더 두려운 것은 이런 순간에도 위기의 비상벨을 울리고 국가의 새로운 성장 판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동 개혁으로 영국을 구해낸 마거릿 대처 전 총리, 연금·노동 개혁을 완수해 ‘유럽의 병자’ 독일을 살린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같은 우상적 인물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증세(부가세)를 얘기하다 물러난 브라이언 멀로니 캐나다 전 총리처럼 퇴로를 없애고 국가를 살리겠다고 나서는 지도자까지도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성장 절벽’의 현실을 솔직하게 말하고 미래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면 족하다. 실행을 하지 못하더라도 화두를 던지고 공론의 무대를 만들어 국민의 절반, 아니 4분의 1이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면 된다. 오죽하면 대선 후보 TV 토론에서 연금 개혁을 외친 후보의 목소리가 울림을 줬겠는가.
코로나 2년 동안 우리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왔다. 정치인들이 수십조, 수백조 원의 세금을 퍼붓겠다고 해도 전염병에 고통 받는 국민을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로 이해했다. 양대 대선 후보가 50조, 100조 원을 도박판 베팅 하듯 외쳐도 코로나로 생계를 잃고 빚의 가위에 눌린 자영업자의 눈물을 생각하며 한 번은 곱씹어 보려 했다. 누가 승리하든 차기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아니 당선인이 되는 순간부터 천문학적인 세금을 투하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 세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차기 대통령의 국정 화두는 코로나 이후로 향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코로나 시대 이후 대한민국이 무엇으로 먹고살지에 대한 비전으로 짜인 메가 플랜이다. 나눠 먹기를 잘하는 ‘제로섬 대통령’은 지난 5년으로 충분하다. 이젠 분배에 매몰된 ‘포퓰리즘 국가주의’가 아닌, 경제적 부가가치를 만들 ‘생산적 국가주의’가 필요하다. 말로만 외치는 ‘G5(5대 강국)’가 아니라 국가 지도자가 전면에 서서 바닥에 떨어진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시장 자율을 기반으로 실용과 구조 개혁이 교직된 새로운 형태의 국가주의를 만들 때다. 그것이 ‘노믹스’의 형태로 승화할 수 있다면 국민들은 합일된 에너지를 분출하고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