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통령 선거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가운데 각종 변수가 떠오르며 선거 판세가 요동을 치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지지율 일부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쪽으로 결집하면서 단일화 이슈는 이제 야권뿐 아니라 여권의 고민거리로도 떠올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침묵하던 문재인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대선판 등장은 또다른 변수로 떠올랐다. 임기 말 현직 지도자가 제1야당 대선 후보와 각을 세우는 건 유례가 없는 승부수다. 문 대통령의 본격 등장은 대선 구도 변화와 진영 결집에 막판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정권 재창출의 유일한 반전 요소가 된 안 후보 단일화에 문 대통령이 보이지 않는 변수가 될 지도 관심사다.
尹 “文정부 적폐수사” 공언에…靑 “매우 불쾌, 선 지켜라”
지난 9일 공개된 윤 후보의 중앙일보 인터뷰는 대선을 대하는 청와대 입장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윤 후보는 해당 인터뷰에서 ‘집권하면 전 정권 적폐청산 수사를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해야죠. 해야죠. 돼야죠”라고 답했다. 윤 후보는 최측근 검찰 간부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해 검찰공화국을 만들 것이란 여권 일각의 주장을 두고도 “여권의 프레임”이라며 “민주당 정권이 검찰을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나. 거기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어 “A검사장에 대해 이 정권이 한 것을 보라. 이 정권에 피해를 많이 입어서 중앙지검장 하면 안 되는 것이냐”며 “A검사장은 거의 독립운동처럼 해 온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윤 후보는 다만 “내가 A검사장 등을 중용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대통령은 수사에 관여 안 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윤 후보는 8일까지만 해도 유튜브 인터뷰 영상을 통해 문 대통령을 두고 “참 정직한 분”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세월이 지나면서 문 대통령을 둘러싼 거대한 집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전형을 봤다”며 문 대통령을 두둔하고 측근들을 비판했다. 문 대통령도 같은 날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대통령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고 우리 정부 임기도 3개월 남았다”며 각 부처에 ‘공정한 선거 관리’만 주문했다.
9일을 기점으로 갑자기 상황은 달라졌다. 청와대는 윤 후보의 ‘민주당 정권 범죄’ ‘적폐 수사’ 발언에 이례적으로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예정에 없던 만남을 가졌다. 이후 윤 후보 발언에 겨냥해 “매우 부적절하고 매우 불쾌하다”며 “아무리 선거이지만 지켜야 할 선이 있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참모들의 전언 형식을 띠었지만 청와대 시스템 상 문 대통령의 암묵적 동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여권 주요 인사들도 일제히 윤 후보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이 후보는 서울시의회 앞에서 기자들과 만나 “듣기에 따라 ‘정치 보복을 하겠다’고 들릴 수 있는 말씀”이라며 “매우 당황스럽고 유감스럽다”고 꼬집었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이재명 플러스’ 애플리케이션에 올린 글에서 “어디 감히 ‘문재인 정부 적폐’라는 말을 입에 담는단 말이냐”며 호통을 쳤다.
이에 윤 후보는 같은 날 천주교 서울대교구청에서 기자들과 만나 “불쾌할 일이 뭐가 있는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면 불쾌할 일이 없다”며 “내가 한 것은 정당한 적폐 처리이고 남이 하는 것은 보복이라는 프레임은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대선 한복판 직접 나온 文…“尹 사과하라, 강력 분노”
청와대와 윤 후보 간 기 싸움은 10일 문 대통령의 직접 출현으로 점입가경 양상을 띠었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이 이날 참모회의 때 윤 후보를 겨냥해 “중앙지검장·검찰총장 재직 때는 이 정부의 적폐를 못 본 척했다는 말이냐”라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없는 적폐를 기획 사정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것이냐”라며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 불법으로 몬 데 대해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반발은 철저한 정치 중립을 강조해온 기존 입장에 비춰볼 때 이례적이었다. 역대 대통령의 임기 말과 비교해도 초유의 일이었다. 윤 후보의 발언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한 문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문 대통령이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전략적 역할을 사실상 자청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세계 7대 통신사와의 서면 인터뷰에서도 “노 전 대통령 퇴임 이후 비극적인 일을 겪고도 정치 문화가 달라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윤 후보를 향한 청와대의 비난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같은 날 기자들과 만나 “발표된 문장은 문 대통령이 직접 메모지에 써 오셔서 저희(참모들)에게 준 것”이라며 “토론이나 의견 교환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통령이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반론권을 행사하는 것”이라며 “일종의 가짜뉴스에 대한 정당한 해명”이라고 강조했다. 또 “선거 개입이라고 하면 식물 대통령처럼 죽은 듯이 직무 정지 상태로 있어야 되느냐”며 “선거에 대통령을 끌어들이지 않을 노력은 야당도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윤 후보 발언을 두고 “선거 전략 차원에서 발언한 것이라면 굉장히 저열한 전략이고 소신이라면 굉장히 위험하다”며 “최소한 민주주의자라면 그런 발언은 하면 안 된다”고 거듭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 말씀대로 윤 후보가 대통령의 질문에 답변하고 사과하면 깨끗하게 끝날 일”이라며 “우리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슴 아픈 기억들을 갖고 있지 않느냐. 그런 것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선거가 정상화되면 좋겠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서로 지킬 것은 지키자”고 제안했다.
윤 후보는 재경전북도민 신년인사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내 사전에 정치 보복이라는 단어는 없다”면서도 “문 대통령도 성역 없는 사정을 강조해왔다. 나도 똑같은 생각”이라고 재반박했다.
‘文 대 尹’ 치열한 정치 수 싸움…양 진영 결집 극대화
문 대통령과 윤 후보 간 충돌은 곧장 여야 공방으로 이어졌다. 이양수 국민의힘 선대본부 수석대변인은 10일 구두 논평에서 “문 대통령이 적폐 수사 원칙을 밝힌 윤 후보를 향해 사과를 요구한 것은 부당한 선거개입으로 유감을 표한다”고 반발했다. 같은 당의 이준석 대표는 페이스북에서 “중국에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야당에만 극대노하는 선택적 분노는 이해하기 어렵다”며 “앞으로 28일간 청와대가 야당 후보를 사사건건 트집 잡아 공격하려고 하는 전초전이 아니길 바란다”며 비꼬았다.
반면 이 후보는 취재진을 만나 “많은 대선 과정을 지켜봤지만 후보가 정치 보복을 사실상 공언하는 것은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서는 “국민들께 사과하시기 바란다”고 쏘아붙였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페이스북에 “김대중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벽에 대고 욕이라도 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하다”고 썼다. 문 대통령의 전직 비서관 29명은 11일 “전두환씨가 총칼로 집권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노 전 대통령을 보내드려야 했다”며 “문 대통령을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윤 후보와 문 대통령 간 공방을 두고 단순한 감정 싸움보다는 치열한 정치 수 싸움의 성격이 더 강한 것으로 해석했다. 윤 후보은 그간 중도층을 넘어 민주 진영 지지자들까지 적극 공략해 왔다. 보수 진영의 불모지였던 호남을 수차례 찾아 김 전 대통령을 추억했다. 지난 5일에는 제주 해군기지가 위치한 강정마을을 찾아 노 전 대통령을 두 번이나 언급하고 감정이 북받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나온 중앙일보 인터뷰 발언은 좌우를 포괄하는 반문(反文) 결집을 위한 전략적 포석이라는 분석이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사건, 월성 원전 보고서 조작 사건, 라임·옵티머스 금융사기 사건 등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운 수사 만큼은 확실히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재천명한 효과도 있다.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을 분리해 전통적 보수 지지자들을 안심시킨 셈이다. 대선 구도를 자신과 ‘신(新)적폐’로 다시 한 번 재배치하는 고도의 전략이다.
‘신적폐청산’이 정권교체의 최대 명분으로 부각할 경우 단일화 협상판에서 안 후보에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애초에 장외 주자였던 윤 후보가 대권 주자로 주목받은 지점도 경제·외교·행정 능력이 아닌 그의 적폐 수사 실적, 현 정권과의 대립 관계가 전부였다. 강점은 살리고 불리한 이슈는 덮으며 체급은 현직 대통령과 동등하게 높일 수 있다.
靑, 후속 역할 할 수도…최대 승부처는 ‘安 단일화’
문 대통령에게도 윤 후보의 발언은 하나의 반전 계기였을 수 있다. 수세에 몰린 이 후보에게 직접 돌파구를 만들어 줄 빌미가 됐다는 것이다. 윤 후보가 보수 진영의 대표 주자가 된 그 순간부터 현 정부를 심판하라는 야권 지지자들의 기대를 문 대통령이 몰랐을 리는 없다. 윤 후보가 자신에게 쉽게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예상 못했을 리 없다. 윤 후보와 연계한 노 전 대통령 서거는 자신을 비롯한 ‘친노(親盧)’ 부활의 기점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당장 진영 집결을 통해 40%가 넘는 지지율을 이 후보에게 그대로 전달하기만 해도 상당한 성공이다. ‘이 후보는 문 대통령이 원하는 후임자가 아니다’라는 의심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 이 후보 부인 김혜경씨 갑질 의혹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활력이 떨어진 여권 선거 분위기에 투쟁심을 불어넣는 효과도 있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의 등판은 이 후보에게 남은 유일한 반전 카드인 ‘단일화’에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당초 단일화는 정권교체를 대의로 안 후보와 윤 후보 사이에서만 거론됐으나, 최근에는 이 후보가 안 후보에게 더 절박하게 구애하는 모양새댜. 이 후보는 180석에 육박하는 범여권 의석을 앞세워 안 후보가 원하는 다당제 안착에 실질적 도움을 줄 수 있다. 문 대통령의 메시지가 단일화를 위한 여당 의원들의 단합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안 후보에게는 ‘적폐청산의 반복’이 아닌,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을 줄 수도 있다.
물론 현재의 대립각이 문 대통령과 윤 후보에게 각각 불리하게 작용할 여지도 있다. 윤 후보 입장에서는 자칫 ‘정치보복’ 프레임이 부각할 수 있다는 게 문제다. 전 정권 수사는 중도층이 염증을 느낄 수도 있는 주제다. 윤 후보의 비전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
문 대통령과 여권에는 이 후보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게 부담이다. 정권교체 여론이 높은 상태에서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를 꾀한 이 후보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문 대통령 자신은 적폐청산을 제1 공약으로 앞세워 당선됐으면서 야당에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로남불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문 대통령 역시 윤 후보와 마찬가지로 경제·외교·행정 능력보다는 박근혜 정부 심판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업고 집권했다. 현 정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일본, 법원, 검찰, 언론, 의사 등 스스로 적폐로 규정한 세력과의 싸움을 임기 내내 이어갔다. 문 대통령의 돌격대장은 다름 아닌 윤 후보였다.
정치권 안팎에서 청와대가 숨 고르기를 마친 뒤 조만간 후속 대응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정권 재창출의 당위성을 스스로 천명한 만큼 진영 결집 메시지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 개입 논란은 피하면서 말이다. 사활이 걸린 핵심 과제는 단일화와 중도층 포섭이다. 안 후보는 10일 페이스북에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유일한 적임자, 안철수입니다”라는 제목의 양비론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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