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장 시간이 이미 지난 오후 10시 서울 강남구 현대백화점 본점. 문은 굳게 닫혔지만 정문 앞에는 5여 명이 줄을 서있었다. 다음날 오후 7시께 배포되는 롤렉스 '입장권'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이다. 매장 입장 시간은 이튿날 오전 10시 30분이다. 롤렉스 매장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해 21시간을 대기하는 셈이다. 원하는 제품을 모두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직장인 A씨는 "매일 입고되는 제품이 달라 입장권을 얻어도 5분 만에 매장에서 나와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국내 럭셔리 시계 시장 성장세가 가팔라지고 있다. 코로나19로 보복소비 현상이 생겨나면서 고가 시계에 대한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 명품이 흔해지면서 파텍필립과 바쉐론 등 '명품 위의 명품'을 구매하려는 심리도 고가 시계 인기에 불을 붙였다. 인기 모델은 리셀 시장에서 수 천 만원의 프리미엄(웃돈)이 붙어 팔리고 있다.
16일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명품 시계 시장규모는 1조 1177억 원으로 전년(1조 477억 원)대비 7% 가량 성장했다. 총 8개 명품 카테고리 중 가장 높은 신장률이다. 이어 가방(6.4%)과 의류(6%), 주얼리(5%) 등의 순이다. 올해도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이달 1~10일 고가 시계 매출은 전년 동기간 대비 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신세계백화점에서도 매출이 17% 늘었다. 백화점 관계자는 "입학?졸업 시즌과 맞물려 고가 시계 신장률이 큰 폭으로 늘었다"고 말했다.
럭셔리 시계시장 '큰 손'은 젊은 예비부부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만큼 백화점에서 고가 예물을 사려는 보상심리가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최근에는 웨딩링보다 예물 시계에 더 큰 돈을 투자하는 신혼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오는 4월 결혼을 앞둔 김모(34)씨도 웨딩링을 포기하고 롤렉스 시계를 커플로 구입했다. 예비신부가 선택한 '롤렉스 레이디 데이저스트' 가격은 1500만 원대다. 김 씨는 "웨딩링만해도 한 쌍에 500~600만 원"이라며 "반지는 저렴하게 맞추고, 쌈짓돈을 더해 구매를 했다"고 말했다.
가격이 계속 오르는 것도 구매 심리를 자극한다. 롤렉스는 지난달 1일부터 주요 시계 모델 가격을 8~16% 가량 인상했다. 인기 모델인 '서브마리너 논데이트'는 985만 원에서 1142만 원으로 16% 올랐다. 이 모델은 2010년대 초반만해도 500만 원대에 구매할 수 있었지만, 10년새 2배가 넘게 비싸졌다. 바쉐론 콘스탄틴도 이달 초 주요 시계 가격을 100만 원씩 올렸다.
인기 모델은 구하기도 힘들다. 파텍필립과 롤렉스 등 고가 시계 브랜드는 VIP에게 우선적으로 인기 제품을 구매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수요는 리셀 시장으로 몰린다. 발매 가격이 1165만 원인 롤렉스 '서브마리너 데이트'의 리셀가는 현재 3100만 원대에 형성돼있다. 리셀가 역시 꾸준히 오른다. 이 모델은 지난달 초 2500만 원에 거래가 이뤄졌다.
고가 시계 시장이 커지면서 출사표를 던지는 업체들도 늘어나고 있다. LF는 지난해 9월 국내 첫 온·오프라인 연계(O4O) 명품시계 멀티숍 '라움 워치'를 론칭했다. LF몰에서 주문한 뒤 구매 상품을 매장에서 직접 확인하고 가져가는 방식이다. 구매자에게는 'LF 워런티 카드'를 발급해 정품을 보장해준다. 라움 워치 관계자는 "수억짜리 파텍필립 시계도 매달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플랫폼들도 앞다퉈 명품 시계 리셀 서비스를 도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