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 핵심 산업인 반도체·배터리 제조에 쓰이는 핵심 소재를 잘 만드는 나라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이미 초유의 공급망 마비 현상을 겪고 있던 국내 업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문제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도 서방국가의 러시아 제재 등으로 물류 피해가 극심해지고 있다. 양국 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는 이상 뚜렷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네온 등 반도체 핵심 원료를 공급해오던 우크라이나 업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발발 이후 국내 소재 업체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국내 소재 업체들의 재고는 거의 바닥 수준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라 업체들은 우크라이나산 네온 대체재 확보에 분주하다. 하지만 대체 물량이 있는 미국·중국 소재 업체들은 최대 2배 이상 뛴 가격을 부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네온은 빛으로 회로를 찍어내는 노광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희귀 가스다. 이 소재가 없으면 모든 생산 라인이 멈출 가능성이 있을 만큼 중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네온은 지난해 반도체 수요 증가로 이미 공급 부족을 겪고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며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뾰족한 대책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네온 부족은 비단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최대 노광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도 이번 전쟁에 영향을 받아 대체재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 칩 제조사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이달 초 미국 출장에서 주요 고객사를 만나 칩 생산 일정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칩 회사들은 협력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상황을 점검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들어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이 조금씩 해소될 것으로 기대했던 국내 완성차 업계도 다시 불안에 떨고 있다. 원자재난 여파로 차량용 반도체 공급의 불확실성이 한층 높아지면서 재고와 수입 물량을 파악하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모습이다. 한국GM은 이날까지도 3월 생산 계획안을 최종 확정 짓지 못하고 검토 중이다. 지난해 절반 수준까지 낮아진 공장 가동률을 이달에는 100%로 끌어올리며 생산 정상화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지만 또다시 좌절되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할 경우 휴업 가능성도 점쳐진다.
글로벌 완성차 공급망 붕괴도 현실화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우크라이나산 와이어링 하니스(자동차 배선 뭉치) 공급 차질로 나흘간 츠비카우 공장 등 독일 내 생산 기지 두 곳을 멈춰 세운다.
국내 배터리 업계도 우크라이나 사태 심화로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는 전 세계 니켈 매장량의 10%를 보유한 생산량 3위 국가다. 이번 사태와 맞물려 니켈 가격은 올해 들어 20%가량 오른 상태다. 원자재 공급난이 갈수록 심화하면서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세계 최대 니켈 생산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벤치마크미네랄인텔리전스(BMI)에 따르면 올해 인도네시아에서 니켈 가공품(MHP)의 생산량은 전년 대비 5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LG에너지솔루션이 현대자동차와 손잡고 인도네시아 카라왕 지역에 배터리 공장을 짓는 것도 원자재 공급망을 확대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코발트·리튬 등 주요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도 인도네시아에서 니켈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서방국가들의 대러시아 경제제재 등으로 세계 각지 하늘길과 바닷길이 막히면서 글로벌 물류 마비 현상도 불가피하게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일본제철과 오스트리아 푀스트알피네 등 철강 업체들은 스위스의 철광석 펠릿 수출 업체 페렉스포가 우크라이나에서 화물을 조달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해 다른 공급 업체를 물색하고 있다. 철강 회사들의 생산성 둔화와 비용 상승이 예상된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미국 곡물 거래 업체 카길은 최근 자사가 임대한 화물선 한 척이 우크라이나 영해 운항 중 발사체에 피격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이 회원국 상공에서 러시아 항공기 운항을 금지하고 영국 정부는 러시아 국적 유조선의 자국 항구 이용을 막는 방안을 고려하는 등 제재 수위가 격상하는 분위기에 운송비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WSJ는 “제재 대상이 아니더라도 러시아와의 모든 무역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