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되면서 국내 반도체 기업 공급망에 다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해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통신 장비, 컴퓨터 등 핵심 제품에 대한 수출 통제에 나서면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공급망과 관련해 “기업과 핫라인을 구축해 수급 상황을 세밀하게 모니터링하라”며 “제3국 수입, 재고 확대, 대체재 확보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수급 안정화를 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실제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가스 등 원자재 조달에 빨간불이 켜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네온·크립톤·제논 등 희귀 가스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네온의 경우 수입액의 23%와 5%를 각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들여오고 있다. 현재 네온가스 가격은 전년 대비 무려 200%나 급등했다.
중소 반도체 기업 대표는 “네온 재고가 거의 없으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공급사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며 “중국 등으로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반도체 공급망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자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이달 초 미국을 방문해 거래처와의 면담을 포함해 상반기 착공될 예정인 테일러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설비 라인을 중점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대(對)러시아 제재가 본격화되면 삼성전자는 반도체 수출 시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반도체는 물론 스마트폰까지 전략물자에 포함되면 러시아 수출길이 아예 막힐 수 있는 상황이다.
공급망 차질은 자동차 업계로 전이되고 있다. 한국GM은 반도체 수급 불확실성으로 3월 생산계획안을 확정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독일 폭스바겐도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배선 시스템을 구하지 못해 작센주의 츠비카우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하는 처지다. 배터리 기업들도 인도네시아 등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가 전 세계 니켈 매장량의 10%를 차지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사태로 니켈 가격은 20% 급등했다.
류성원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정책팀장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내 기업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며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수입해온 원자재 물량을 다른 국가로 다변화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네온 공급해오던 러·우크라社 연락두절…재고 바닥에 '발동동'
우크라이나는 우리나라 핵심 산업인 반도체·배터리 제조에 쓰이는 핵심 소재를 잘 만드는 나라다.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이미 초유의 공급망 마비 현상을 겪고 있던 국내 업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문제가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곳곳에서도 서방국가의 러시아 제재 등으로 물류 피해가 극심해지고 있다. 양국 간 갈등이 봉합되지 않는 이상 뚜렷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28일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네온 등 반도체 핵심 원료를 공급해오던 우크라이나 업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발발 이후 국내 소재 업체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국내 소재 업체들의 재고는 거의 바닥 수준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따라 업체들은 우크라이나산 네온 대체재 확보에 분주하다. 하지만 대체 물량이 있는 미국·중국 소재 업체들은 최대 2배 이상 뛴 가격을 부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네온은 빛으로 회로를 찍어내는 노광 공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희귀 가스다. 이 소재가 없으면 모든 생산 라인이 멈출 가능성이 있을 만큼 중요하다. 업계 관계자는 “네온은 지난해 반도체 수요 증가로 이미 공급 부족을 겪고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사태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며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뾰족한 대책을 마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네온 부족은 비단 국내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최대 노광 장비 업체인 네덜란드의 ASML도 이번 전쟁에 영향을 받아 대체재 확보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 칩 제조사들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은 이달 초 미국 출장에서 주요 고객사를 만나 칩 생산 일정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주요 칩 회사들은 협력사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상황을 점검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올해 들어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이 조금씩 해소될 것으로 기대했던 국내 완성차 업계도 다시 불안에 떨고 있다. 원자재난 여파로 차량용 반도체 공급의 불확실성이 한층 높아지면서 재고와 수입 물량을 파악하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모습이다. 한국GM은 이날까지도 3월 생산 계획안을 최종 확정 짓지 못하고 검토 중이다. 지난해 절반 수준까지 낮아진 공장 가동률을 이달에는 100%로 끌어올리며 생산 정상화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지만 또다시 좌절되는 분위기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악화할 경우 휴업 가능성도 점쳐진다.
글로벌 완성차 공급망 붕괴도 현실화하고 있다. 폭스바겐은 우크라이나산 와이어링 하니스(자동차 배선 뭉치) 공급 차질로 나흘간 츠비카우 공장 등 독일 내 생산 기지 두 곳을 멈춰 세운다.
국내 배터리 업계도 우크라이나 사태 심화로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는 전 세계 니켈 매장량의 10%를 보유한 생산량 3위 국가다. 이번 사태와 맞물려 니켈 가격은 올해 들어 20%가량 오른 상태다. 원자재 공급난이 갈수록 심화하면서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세계 최대 니켈 생산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인 벤치마크미네랄인텔리전스(BMI)에 따르면 올해 인도네시아에서 니켈 가공품(MHP)의 생산량은 전년 대비 5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LG에너지솔루션이 현대자동차와 손잡고 인도네시아 카라왕 지역에 배터리 공장을 짓는 것도 원자재 공급망을 확대하기 위한 측면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코발트·리튬 등 주요 글로벌 원자재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이 인도네시아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도 인도네시아에서 니켈을 확보하기 위해 더욱 서두르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서방국가들의 대러시아 경제제재 등으로 세계 각지 하늘길과 바닷길이 막히면서 글로벌 물류 마비 현상도 불가피하게 됐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일본제철과 오스트리아 푀스트알피네 등 철강 업체들은 스위스의 철광석 펠릿 수출 업체 페렉스포가 우크라이나에서 화물을 조달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해 다른 공급 업체를 물색하고 있다. 철강 회사들의 생산성 둔화와 비용 상승이 예상된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도 발생하고 있다. 미국 곡물 거래 업체 카길은 최근 자사가 임대한 화물선 한 척이 우크라이나 영해 운항 중 발사체에 피격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유럽연합(EU)이 회원국 상공에서 러시아 항공기 운항을 금지하고 영국 정부는 러시아 국적 유조선의 자국 항구 이용을 막는 방안을 고려하는 등 제재 수위가 격상하는 분위기에 운송비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WSJ는 “제재 대상이 아니더라도 러시아와의 모든 무역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