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은 103번째 맞는 3·1절이었다. 그리고 그 일주일 전인 지난 2월 21일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 공화국 2개에 대한 독립을 승인하고 병력 진입 명령을 내렸다. 침공으로 인해 겪게 될 우크라이나 정부와 국민들의 고통과 슬픔·분노에 공감하며, 침공에 나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국 내에 많다는 것을 알게 돼 상처는 더 크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적극적 제재 조치를 제기하는 미국에 대해 일본이나 싱가포르 등과는 달리 미온적 자세를 보였던 한국 정부도 그중 하나다. 이번 사태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외교적 경험 미숙에 의해 촉발된 것처럼 언급하는 전문가나 정치가, 그리고 일부 언론들도 같은 부류다.
그나마 제재 조치에 대한 정부의 참여 의사가 3·1절 하루 전인 2월 28일에는 발표돼 다행이다. 3·1운동 정신은 국가와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류의 평등, 그리고 반침략 및 반강압 정신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한국의 입장은 침공 징후가 보인다고 할 때, 지난해 4월께라도 비판적 입장을 제시하고 최근의 미국 선도에 있어서는 일본이나 싱가포르보다도 더 적극 참여했어야 했다. 한국 정부가 그렇게 하지 못한 데는 여론 주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관련 분야 전문가나 관심 정치가, 그리고 언론 등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오류의 일부 혹은 전부를 범하며 정부를 제대로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이 부족해 범하는 오류다. 맹자의 언어를 빌리자면 ‘시비지심’이 부족해 ‘지(智)’가 없거나 그걸 모른다는 것으로, 이는 서구 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로부터의 안보 위협이나 우크라이나 동부의 독립 요구 등을 침공의 이유로 주장하는 러시아와 자유 민주 체제를 지향해 독립을 유지하려는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근대 한국의 피식민 지배 경험을 돌이켜보면 침공을 비판하고 피침략자를 옹호해야 하는 분별은 너무도 명확하다.
둘째는 불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다. 즉 러시아의 주장과 우크라이나의 주장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하고 그것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끄럽게 느끼지 않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염치 없음은 중국 등의 몇 개 국가들만이 러시아를 옹호한다는 것에서도 그 잘못됨이나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공감하는 마음이 부족한 데서 오는 오류다. 즉 ‘측은지심’이 부족해 ‘인’을 모른다는 것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젤렌스키 대통령을 경험 부족으로 비판하는 것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위기와 고통의 시기에 필요한 것은 위로와 지원, 그리고 단결이다. 피식민 지배의 경험과 이념 갈등에 따른 전쟁을 딛고 일어나 경제 발전과 민주화에 어렵게 성공한 한국으로서는 자유 민주 체제 또는 서구 및 나토라는 선택을 취한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그 선택을 응원하고 지원해야 할 때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러시아와 같은 독재국가가 제시하는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또는 ‘평화’라는 것이 거짓이고 허울뿐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와 같은 성향의 중국이나 북한을 대면해야 하는 한국의 외교는 더 이상 이러한 허위의식에 휘둘리지 말고 국익을 제대로 파악하는 ‘지’ ‘의’ ‘인’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지난 세월의 경제적 성공이나 정치적 민주화 달성, 그리고 그에 따른 선진국 진입이 이러한 공감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사회는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선진국에 진입하는 한국도 경제적·이념적 습성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이 자유롭게 서로 인정하고 돕는 세상에 일조하는 외교에 앞장서는 품격을 갖춰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