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지브러리] '엄청난 차 사랑' 터키와 영국의 과거 카페는 '위험한 곳'이었다?

과거 커피하우스는 중상모략의 공간으로 여겨져 폐쇄되기도

'차'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삶의 일부가 된 터키와 영국

터키와 영국의 차 소비량은 여전히 전 세계 상위권






지난해 12월 말 기준 전국 커피 음료점 사업자 수 8만 3363개. 그야말로 거리 어디에서나 눈만 돌리면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카페다. 카페는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지인과 모임을 갖는 장소이며 심지어 공부를 위한 학습장 역할도 담당한다. 카페는 오늘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남녀노소 출입 가능한 가장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다.



하지만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했던 카페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터키의 커피하우스, 일명 ‘카흐베하네’는 여성은 출입할 수 없었던 남성만의 공간이었다. 또한 터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모사’를 꾸밀 수 있다며 국가로부터 폐쇄당하기도 했다.

‘이곳을 왕이 싫어합니다’…중상모략의 공간이 된 카페


Depiction of an Ottoman coffeehouse, Amadeo Preziosi(1854)Depiction of an Ottoman coffeehouse, Amadeo Preziosi(1854)


이슬람 문화권인 터키의 ‘카흐베하네’라는 이름의 커피하우스는 남자들만 출입이 가능한 장소였다. 지금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카페와 같이 단순한 교류의 장이 아니라 마시고 대화를 즐기며 관계를 맺어가는 선술집 역할도 함께 했던 장소였다.

당시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임과 대화를 오락 자체로 여겼다. 이슬람 정신의 바탕이 되는 코란에서 금주를 강조했기에 해갈용 음료로 커피가 선택됐다.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이슬람에서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해주고 신을 온전히 찾을 수 있는 음료로 간주했다”라고 설명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커피하우스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했다. 오종진 한국외대 터키 아제르바이잔어과 교수는 “커피하우스에 사람이 모이게 되자 여러 정치적인 이슈가 생겼고 이를 불안하게 여긴 술탄 셀림과 무라트 4세 때 커피하우스가 잠정적으로 운영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모두를 포용하는 터키의 ‘티 하우스’


현대 카흐베하네 전경, 유누스엠레 터키문화원 제공현대 카흐베하네 전경, 유누스엠레 터키문화원 제공


이후 터키 사람들의 모임 문화와 음료 소비문화의 중심지였던 커피하우스의 대안적 공간으로 티하우스인 ‘차이하네’가 들어선다. 오 교수는 “차는 일반 대중에게 터키 커피보다 손쉽게 많은 양을 함께 나눌 수 있었기에 커피를 대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차이하네는 남녀노소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남자들만 출입할 수 있었던 카흐베하네와 큰 차이가 있는 것. 잔 을드즈 유누스 엠레 터키문화원 부원장은 “오늘날 터키의 보편적인 카흐베하네와 차이하네는 남녀노소 누구나 출입해서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모여서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터키인의 일과로 자리 잡고 여성들의 출입도 자연스러워지면서 차는 공동체에서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경제와 정치의 중심지가 된 영국 커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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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하우스는 터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후 영국으로 전파됐다.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세운 사람은 터키 출신의 유대인 제이콥이다. 그는 알고 지내던 터키인에게 커피를 공급받고 1650년 옥스퍼드 지역에 커피하우스를 개장한다. 영국의 커피하우스에서는 무역인들이 차 한 잔과 함께 그들의 장사와 거래를 성사시키는 비즈니스 미팅 장소로 활용됐다.

로이드 보험 시장 전경, Lloyd's of London 공식 홈페이지로이드 보험 시장 전경, Lloyd's of London 공식 홈페이지


당시 탄생한 커피하우스 중 로이드 커피하우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무역에 관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이 편안하게 잠깐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로 떠오르면서 보험 가입자를 찾아야 하는 보험 중개인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주목받는 곳이었다. 이 커피하우스는 현대 로이드 보험 시장의 시초가 된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정치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장소로도 사용됐다.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던 시절은 올리버 크롬웰의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던 시기였다. 크롬웰은 쿠데타 후 당시 국왕이었던 찰스 1세를 폐위시키고 단두대에서 처형한 다음 공포정치를 편 인물이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세월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 런던 시민들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커피하우스에서 정치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게 된다. 크롬웰 사후 왕정이 복고되면서 복위된 찰스 2세는 커피하우스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곳을 경계했다. 그는 심지어 1675년 12월 19일에는 커피하우스를 폐쇄하기까지 한다.

자선과 박애 정신의 실현 수단으로 ‘차’를 사용한 영국


유행은 커피에서 차로 옮겨갔다. 영국은 특히 수질이 좋지 않았기에 물보다 커피나 차를 더욱 즐겼는데 이 시기 노동자들은 “아침부터 물을 대신해 마신 술로 인해 노동자들은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결근도 잦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만큼 술로 인한 문제가 많았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빅토리아 여왕은 ‘차’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빅토리아 여왕(1819~1901)


빅토리아 여왕은 기독교의 복음주의라는 사상적 배경 아래 음주 예방을 목적으로 차를 마시게끔 계몽 활동에 앞장섰다. 그리고 이를 체계적으로 이끌기 위해 ‘티 모럴리티(Tea Moralities)’라는 단체를 세운다. 국민들에게 알코올의 폐해를 알리고 차를 마시도록 적극적으로 계몽함으로써 자선과 박애 정신의 구체적 실현 수단으로 ‘차’를 이용한 것이다. 노동 계급은 자연스럽게 당시로써는 고급문화였던 차 문화를 접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산업 사회의 진입으로 가면서 홍차는 마시기에 간편하며 정신도 맑게 해주었기에 건강과 일의 능률을 높이는 데 매우 중요한 음료로 자리 잡게 된다.

터키인과 영국인들의 차 사랑은 여전히 ‘ing’


현재도 터키와 영국의 차 사랑은 여전하다. 한국 농수산 식품 공사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터키의 1인당 차 소비량은 3.16kg으로 전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터키에서 모든 일자리에는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두고 ‘차이즈’라는 전문 차 인력이 차를 끓이고 배달한다. 터키에서 차를 주겠다고 하는 호의는 무조건 수용하지 않으면 베푸는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일로 간주할 정도로 차에 대한 터키인들의 사랑은 대단하다.

차이즈, Pınar Cevikayak Yelmi차이즈, Pınar Cevikayak Yelmi


영국도 차 사랑이 식을 줄 모른다. 이주현 한국 티소믈리에 연구원 실장은 “영국은 차 마시는 시간대별로 Bed tea(Early tea), breakfast tea, elevenses, afternoon tea, high tea, after dinner tea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며 하루에 평균 7잔의 차를 마신다고 덧붙였다.

예로부터 카페는 폐쇄해도 또 생겨나는 인기 있는 모임 공간이었다. 현재도 카페에서 중요한 회의를 하기도 하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니 그 전통을 잃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이채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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