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서 불과 5㎞ 남짓 떨어진 로널드 레이건 국립공항에 도착하면 레이건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을 재현한 동상을 볼 수 있다. 이 공항은 원래 워싱턴 국립공항이었으나 레이건 전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1998년 이름까지 바꿨다.
미국인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대통령 중 한 명인 레이건 전 대통령이 남긴 최대 업적이 냉전 종식이다. 그의 소련 경제 붕괴 작전은 공산주의 몰락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냉전에서 승리했다”고 그를 평가했다.
얼마 전 워싱턴에서 만난 한 고위 인사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최근 대러 제재를 두고 “소련 경제 붕괴 작전이 다시 시작됐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충돌하지는 않으나 러시아의 국가 경쟁력을 떨어트려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작전을 미국이 다시 꺼내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 1982년 레이건 전 대통령이 소련의 몰락을 앞당기기 위해 비밀리에 서명한 문서가 있었다. 바로 ‘국가안보결정지침(NSDD·National Security Decision Directives)-66’이다. 여기에 소련의 에너지·금융·기술을 타격하는 정밀한 작전이 담겨 있었다. 1995년 이 문건이 기밀 문건에서 풀린 후에야 많은 사람이 소련의 몰락 과정을 이해하게 됐다.
최근 바이든 정부의 대러 제재를 보면 냉전 시대 레이건 정부의 소련 경제 붕괴 작전과 판박이로 닮아 있다. 당시 미국은 주요 7개국(G7)과 협력해 소련산 천연가스 매입을 중단하고 노르웨이의 북해산 유전 등에서 대체재를 찾았다. 현재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 천연가스 의존도를 줄이면서 미국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대폭 늘리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 더불어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넘어가면 안 될 핵심 기술 등을 관리하는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코콤) 체제를 확고히 정립했다. 최근 바이든 정부도 해외직접제품규칙(FDPR)을 통해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부품의 러시아 수출을 통제하고 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중국 반도체 기업들을 향해 “미국의 승인 없이 러시아에 반도체를 팔면 문을 닫을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궁극적으로 러시아의 혁신을 막고 경제 시스템의 붕괴를 노리는 제재들이다.
물론 당시와는 다른 점도 있다. 소련을 몰락시킨 결정적 ‘한 방’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합작품인 ‘유가 하락’이었다. 수출의 60%를 원유에 의존하던 소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 증산으로 유가가 3분의 1 이하로 떨어지자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고 유가는 여전히 고공 행진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중동 산유국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애꿎은 미국의 비축유만 대거 방출하고 있다.
또 냉전 시대 소련에 든든한 우군이 없었던 것에 반해 지금 러시아에는 중국이 있다. 서방이 러시아 에너지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여 ‘돈줄’을 차단하려 해도 거대한 중국이 뒷받침하면 러시아는 생존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를 두고 “독재국가들끼리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른바 신(新)냉전이다.
문제는 이 같은 국제 정세의 급변이 바로 우리 지근거리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더 핵 무장을 강화하는 북한을 상대하기도 벅찬 마당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주변 4강(미국·중국·러시아·일본) 간의 긴장감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이번 사태의 결말이 새로운 냉전이든, 러시아의 몰락이든, 핵전쟁이든 주변 정세에는 큰 변화가 예상되고 그 여파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미칠 것이다.
냉전 시대 미국의 비밀 작전으로 소련이 몰락해갈 당시 우리에게는 기회가 찾아왔다. 저유가·저금리·저환율 등 3저 호황이 겹치면서 국가 경제가 흑자 기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40여 년이 지나 다시 시작된 미러 간의 경제 전쟁 속 우리의 앞날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