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윤에게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는 미지의 세계 그 자체였다. 파격적인 외형에 격정적인 감정, 그리고 불도저를 운전한 경험은 어디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호기심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불도저에 탄 소녀'(감독 박이웅)는 갑작스러운 아빠 본진(박혁권)의 사고와 살 곳마저 빼앗긴 채 어린 동생 혜적과 내몰린 19살 혜영(김혜윤)이 자꾸 건드리는 세상을 향해 분노를 폭발하는 작품이다. 자신이 정해놓은 경계선을 침범하면 거침없이 물어뜯는 혜영. 어느 날 그는 아빠가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아빠의 행적을 쫓다가 권력의 추악한 민낯을 보게 되고, 불도저처럼 거대 권력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김혜윤은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장편영화 주연을 맡게 됐다. 의미 있는 첫 주연작으로 '불도저에 탄 소녀'를 선택한 건 혜영의 강렬한 모습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강렬한 모습이 자신의 안에도 존재하는지 궁금증이 들 정도였다.
"전 원래 시나리오나 대본을 받았을 때, '내가 어떤 모습으로 연기하겠구나'가 상상이 잘 되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번 작품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전혀 상상이 안 되더라고요. 미지의 세계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도 전 제 안의 색다른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시나리오가 오면 흥미가 많이 생겨요. 그런 작품들 위주로 하다 보니 다양한 모습도 보여드릴 수 있었죠."
혜영은 강렬함을 넘어 파격적인 캐릭터다. 한쪽 팔에는 거다란 문신이 있고, 욕을 입에 달고 다닌다. 항상 화가 나 있어 눈빛은 독기에 가득 차 있고 행동은 거칠다. 김혜윤은 이런 모습들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지만, 현장에서 감독의 지도를 받은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잘 나온 것 같다고 감사했다.
"저는 처음에 혜영이가 문신을 한 이유가 궁금하더라고요. 문신을 했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을지도 궁금했고요. 그런데 감독님이 이야기를 해주셔서 이해가 됐어요. 혜영이는 분명 약점이 있고, 그걸 본인도 인지하고 있는 상태예요. 문신은 그런 부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강해 보이려고 한 거예요. 또 혜영이가 문신을 보면서 용기를 얻기도 하고요. 특정 상황이 되면 스스로 팔 토시를 걷고 나가잖아요. 그런 행위는 19살 소녀가 할 수 있던 최고의 용기지 않을까요."
"혜영이는 개인 영역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큰 친구예요. 또 사람은 저마다 레드 버튼이 있잖아요. 다른 말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이 말을 하면 폭발해 버리는 부분이에요. 혜영이는 이 레드 버튼이 예민한 친구예요. 개인 영역을 넘어 레드 버튼을 누르면 바로 격렬하게 화가 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작품 90% 이상의 분량을 끌고 가면서 시종일관 격정적인 감정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김혜윤은 이 역시 박 감독이 도와줬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칭찬을 돌렸다. 박 감독이 장면과 장면 사이를 계속해서 상기시켜 주고, 모니터링을 철저히 해줘서 어려운 감정을 끌고 갈 수 있었다고.
"물론 혜영이가 매번 분노를 갖고 싸우는 친구다 보니까 감정을 끌어올리기 힘들었어요. 걱정이 돼서 사전에 체력을 쌓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보면서 어떤 감정의 정도를 쌓아야 되는지 많이 보려고 했어요. 전체적인 그림도 보려고 노력했고요. 제가 힘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감독님이 옆에서 정말 잘 잡아주셔서 감사하죠."
김혜윤은 다행히 촬영이 끝난 후에는 혜영의 격렬한 감정에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감정을 해소하는 과정이 오래 걸리지 않아 캐릭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다. 이는 혜영이 작품 속에서 분노를 표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분노를 속으로 삼켰으면 촬영이 끝난 후에도 감정에 빠질 수 있었을 거다.
"혜영이가 감정을 표출하는데, 그러면서 같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대리만족을 하는 기분이었죠. 저는 분노를 잘 표출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더 시원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만약 감정이 차오르고, 순간 내가 너무 잠식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빠르게 생각을 변환시키려고 노력합니다."
혜영의 격정적인 감정은 액션으로 이어진다. 혜영은 맨땅에 구르고 짓밟히고, 사람들에게 맞고, 때리는 등 자신이 갖고 있는 감정을 온몸으로 표출한다. 김혜윤은 "다치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전에 액션 스쿨에서 연습에 임했다.
"파스를 온몸에 붙이고 살 정도로 연습을 했어요. 사실 혜영이가 기술적으로 싸움을 잘하는 게 아니라 몸싸움이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극 초반에 여고생과 싸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실제로 넘어졌어요. 영화에서도 제가 넘어지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어갔어요. 안전하게 넘어지려고 낙법을 제일 많이 배웠는데,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이번에 맛보기로 액션을 해봤는데 정말 즐거웠어요.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또 액션에 도전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몸싸움 정도였는데, 다음에는 와이어도 타면서 기술적으로도 멋있는 액션이면 좋겠어요. 거친 누아르 장르면 좋을 것 같아요."
직접 불도저를 운전한 경험도 특별했다. 김혜윤은 능수능란하게 불도저를 운전하는 혜영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씩 학원에 다니면서 작동법을 익혔다. 간단한 듯하면서도 어려운 조작법에 애를 먹었지만, 그는 열심히 연습한 끝에 중장비와 한 몸이 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불도저를 운전한 경험은 재밌으면서 무서웠어요. 불도저 바퀴가 제 키만 하거든요. 차 자체에서 주는 위압감이 컸어요. '그만큼 이 차가 엄청 세구나'가 저절로 느껴졌죠. 차체도 높아서 바깥을 내려다봤는데, 그 부분은 굉장히 재미있었죠."
항상 독기가 가득한 혜영의 눈빛이 따스하게 변하는 순간은 동생인 혜적과 함께일 때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혜영이 혜적을 엄마처럼 키우면서 더욱 애틋한 사이다. 언니가 있는 김혜윤은 혜적을 보면서 자신이 언니에게 의지했던 순간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언니에게 느낀 감정을 혜적이 혜영에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했다.
"혜영이에게 혜적은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 생각해요. 무조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되는 존재요. 혜적이가 혜영에게 의지하는 것도 있지만, 혜영이가 유일하게 의지하는 것 역시 혜적이에요. 이런 애틋함을 표현하기 위해 혜적이를 연기한 배우와 먼저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마음을 금방 열고 저한테 의지하더라고요. 잘 따라와 줘서 고마워요."(웃음)
이렇게 성공적으로 첫 장편영화 주연 신고식을 치른 김혜윤은 앞으로 다양한 캐릭터와 장르에 도전하면서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캐릭터는 한 번씩 다 경험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배우로서 제 강점은 극중 어떤 환경에 처해도 잘 적응하는 거예요. 앞으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싶어요. 관객들이 절 보면서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요. '눈이 가는 배우'라는 말을 많이 듣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