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로 여는 수요일]꽃도둑의 눈


- 김해자


자고 나면 갓 핀 꽃송이가 감쪽같이 없어지더니

밤새 금잔화 꽃숭어리만 뚝 따 먹고 가더니

좀 모자란 눔인가, 시 쓰는 눔 혹시 아닐랑가

서리태 콩잎보다 꽃을 좋아하다니

이눔 낯짝 좀 보자 해도 발자국만 남기더니

며칠 집 비운 새 앞집 어르신이 덫 놓고



널빤지에 친절하게도 써놓은 ‘고랭이 조심’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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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곳없이 밤마다 코밑까지 다녀가더니

주야 맞교대 서로 얼굴 볼 일 없더니

어느 아침 꽃 우북한 데서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꽃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나 놀란 이 꽃도둑

후다닥 논틀밭틀로 뛰어가는데

아 참, 도둑의 눈이 그렇게 맑다니





‘고랭이 조심’이란 말을 고랭이가 읽고 덫을 피해 요리조리 드나들었나 보군요. 요즘 한글 배우기 열풍이 지구촌 곳곳에 번지고 있다던데, 고랭이도 어지간한 한글 읽고 쓰는지도 모르지요. 고양인 줄 알았더니 금잔화 꽃숭어리, 서리태 콩잎 샐러드 먹는 걸 보니 고라니인가 보군요. 우리나라에선 천덕꾸러기지만 멸종위기에 처한 국제적 보호종이라죠? 현행범과 마주치고도 호수 같은 눈에 풍덩 빠져서 꽃값 청구도 못 하셨군요? 잘 하셨어요. 고라니가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살던 원주민이라니 거꾸로 토지세 내라면 어쩔 뻔했어요?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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