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에 이은 세계 3위 경제 대국 일본이 원자재 가격 급등과 엔저에 따른 ‘적자의 덫’에 빠져들고 있다. 엔화 약세가 가뜩이나 급등한 에너지 비용을 부풀려 지난해 무역수지를 7년 만에 최대 적자에 빠뜨린 데 이어 경상수지도 42년 만에 적자로 돌려세울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엔저와 경상 적자가 서로 맞물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20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은 이날 장중 달러당 129.40엔까지 상승(엔화 가치 하락)하며 130엔을 목전에 뒀다. 전날 미국의 10년물 국채금리가 2.94%까지 급등하며 일본과의 금리 차이가 커지자 투자자들이 엔화를 매도한 결과다. 외환시장 관계자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경험한 적이 없는 정도의 급격한 엔화 가치 하락이 계속되고 있다”며 당혹감을 전했다.
보통 엔저는 일본 기업들의 수출 증가로 이어지며 무역 흑자에 보탬이 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날 일본 재무성은 2021 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 무역수지가 5조 3749억 엔(약 51조 6000억 원) 적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년 만에 첫 무역 적자이자 7년 만에 최대 적자 폭이다. 과거 엔고 때문에 제조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가속화하면서 환율의 수출 증대 효과는 예전만 못해진 반면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원자재 수입 비용만 추가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경상수지의 주축인 무역수지가 앞으로도 적자에 머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이번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경상수지가 오일쇼크 직후인 1980년 이후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설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자체 분석을 통해 환율이 116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5달러일 경우 올 회계연도 경상 적자가 8조 6000억 엔을 기록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은 이미 지난해 12월과 올 1월에 경상 적자를 기록했고 2월에는 흑자(1조 6483억 엔)로 돌아섰지만 지난해보다 규모가 42.5% 급감했다.
시장에서는 경상 적자와 엔저가 맞물려 일본 경제를 짓누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일본은 세계 최대 순채권국으로 해외 투자 이익 및 배당이 막대해 지난 40여 년간 경상 흑자를 유지해 왔다. 그리고 이는 ‘안전 자산’으로서의 엔화 지위를 지키는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하지만 경상 적자가 시작되면 가뜩이나 미국과의 금리 차이 때문에 치솟은 엔·달러 환율이 적자 규모를 키우고 이는 엔저를 더욱 부추기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일본은행은 이날 금리 0.25%에 10년물 국채를 무제한 사들이겠다고 밝혀 급격한 엔저에도 통화 완화 정책을 이어가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재팬타임스는 “수입 비용이 한동안 고공 행진을 할 것으로 보여 일부 전문가들은 경상 적자가 만성적 이슈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