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시중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는 차장급 직원이 관리하고 있던 회삿돈 수백억 원을 빼돌린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10년간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은행의 허술한 내부 통제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아울러 회계장부에 합격 도장을 찍어준 회계법인과 최근까지 종합 검사를 벌인 감독 당국에도 싸늘한 시선이 쏟아지고 있다.
28일 금융업계와 경찰 등에 따르면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직원 A 씨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6년간 세 차례에 걸쳐 특별관리계좌 예치금 중 500억~600억 원을 개인 계좌로 인출한 특경법상 횡령 혐의로 전날 밤에 긴급 체포됐다. 이 돈은 2010~2011년 옛 대우일렉트로닉스가 이란 다야니 가문이 소유한 가전업체 엔텍합으로의 매각이 불발되면서 몰취한 계약금 578억 원과 그 사이 불어난 이자로 알려졌다.
‘다야니’ 가문은 우리 정부를 상대로 계약금을 돌려달라는 내용의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ISD) 소송을 제기했고 2019년 우리 정부가 소송에서 최종 패소해 배상금 등을 돌려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국제 송금을 할 수 없어 배상금 지급도 지연됐으며 이 돈은 우리은행이 특별계좌로 관리하고 있었다. 올해 1월 미국 정부가 ‘배상금 송금을 위한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실(OFAC)의 특별허가서’ 발급을 해줘 배상금 지급이 가능해졌지만 해당 금액은 이미 A 씨가 모두 인출하고 계좌도 해지한 상황이었다. 우리은행 측은 “자체 조사에 따르면 해당 직원은 2012년 처음 계좌에서 돈을 인출해 2018년 마지막 인출 이후 해당 계좌가 해지됐다”면서 “조만간 그 배경이 뭔지 소상히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범죄 행각은 곧바로 금융감독원에도 보고돼 일반은행검사국 1개팀이 수시 검사에 들어갔다. 금감원 관계자는 “즉시 현장 수시 검사에 착수해 구체적인 사고 경위 등을 파악할 예정”이라며 “이제 막 들여다보는 단계라 범행 수법 등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우나 필요하다면 검사 인력 증원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은행의 자체 감사를 통해 횡령 사실이 드러났고 이후 금융 당국이 발 빠르게 사태 파악에 나섰지만 금융업계 안팎에서는 은행의 내부 통제 시스템과 금융 당국의 감독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일반적으로 은행들이 특별관리계좌로 분류해 입출금 시 부서장의 결제를 반드시 받도록 제한을 두고 있다”며 “이번 횡령 사건에서는 부서장 결제를 받았던 건지, 해당 직원이 입출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던 건지 의문”이라고 언급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해당 직원이 한 번 횡령하고 감사에서 넘어갈 수는 있더라도 세 번이나 횡령 후 5년 가까이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당시 은행장이었던 손태승 회장의 책임이 클 것”이라고 했다.
금융 당국 역시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우리은행에 대한 현장 종합 검사를 했는데도 이번 사안을 사전에 발견하지 못했다. 우리은행은 2013년 종합 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민영화와 매각설로 미뤄졌으며 2014년에는 검사 범위가 축소된 종합실태평가로 바뀌었다. 그리고 2016년과 2018년 경영실태평가를 받았지만 A 씨의 범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은행에서 이뤄지는 모든 거래나 업무를 짧은 기간 종합 검사(경영실태평가 포함)로 다 확인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아울러 우리은행 회계장부를 감사해온 회계법인들에 대한 지적의 목소리도 커졌다. 안진회계법인은 2004년부터 2019년까지 16년간, 삼일회계법인은 2020년부터 올해까지 3년간 우리은행의 외부 회계감사를 맡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우리은행에 모두 ‘적정’ 감사 의견을 표명했고 내부회계관리 제도 역시 ‘합격점’을 줬다. 듀 딜리전스(적정 실사) 등을 했지만 전혀 걸러내지 못한 셈이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회계사는 “설마 시중은행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 예상했겠느냐”는 반응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