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가 16년간 순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화합형 리더’였기 때문이다. 메르켈 전 총리의 ‘협치 마인드’는 정당이 아닌 정책에 집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됐다는 평가다. 영국 BBC가 “독일 정치를 정책에 대한 토론장으로 바꿔 놓았다”고 할 만큼 메르켈 전 총리는 야당이 추진하는 정책이라도 적극 검토해 당을 막론하고 동료 정치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냈다.
메르켈 전 총리의 이런 면모는 취임 직후부터 드러났다. 2005년 총선 당시 경쟁자이자 전임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어젠다 2010’, 일명 하르츠 개혁을 계속 추진한 것이다. 어젠다 2010은 노동 유연성과 실업 급여, 임금 삭감을 골자로 한 슈뢰더 전 총리의 경제개혁 정책이다. 국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슈뢰더 전 총리를 패배하게 만든 정책이지만 메르켈 전 총리는 이 정책을 이어받아 과감하게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1%포인트 차로 집권한 메르켈 전 총리의 이런 행보는 야당 정치인들의 신임을 얻는 데 일조했다.
메르켈 전 총리는 2015년 슈뢰더 전 총리의 전기 출판 기념식에 참석해 그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슈뢰더는 경제·복지 개혁을 추진해 독일 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며 “현재 독일의 성공은 슈뢰더의 헌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어젠다 2010 정책을 계속 추진해 독일 고용률을 70%대 중반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던 공을 경쟁자였던 전임 총리에게 돌린 것이다. 양승함 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여소야대 형국에서 정책 추진이 힘들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협치”라며 “야당에 맞서 강대강으로 나서기보다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정책을 펼쳐 야당이 협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정치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메르켈 전 총리의 실용주의적 면모가 화합과 조정의 리더십으로 나타났다는 평가도 있다. 중도 우파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시대 흐름과 사회적 요구에 따라 좌파 정책을 수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일례로 2017년 보수로 분류되는 집권당 기민당의 비판에도 동성 결혼 허용 법안에 대해 의원 개개인의 자유 표결을 허용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메르켈 전 총리를 “현명한 실용주의를 선보이고 윤리의 나침판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이라고 극찬한 이유다.
물론 독일 정치 구조상 협치가 불가피한 점도 있다. 다당제 기반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는 독일은 어느 한 정당만의 힘으로 정부를 수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연립정부를 만들려면 대화와 타협, 그에 따른 정책 수정이 필수적이라 자동으로 협치가 이뤄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독일과 제도는 다르지만 전문가들은 제도 자체보다는 그 마인드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 국책연구원 관계자는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제인 미국에서도 크로스보팅(당에 상관없이 의원 소신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이 많다”며 “무조건 당론만 따르는 것이 아닌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