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황철주 "기술혁신만이 블루오션…尹 직속 민간위 만들어 지원해야"

[이사람]

■반도체 장비 업계 대부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인터뷰

"자원빈국 한국, 혁신으로만 성장 가능"

창사이래 R&D에만 1조원 이상 투입

4년만에 누적 특허 2475→3000개 증가

민간이 혁신가 발굴·정부가 R&D 지원

초기시장 열어주는 국가시스템 구축을

MZ세대 혁신인재로 커야 회사도 발전

"고생은 피해도 일은 피하지 마라" 조언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용인=오승현 기자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 용인=오승현 기자




4일 경기도 용인의 주성엔지니어링(036930) 연구개발(R&D)센터. 굴지의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가 지향하는 바를 웅변하듯 로비 벽 전체를 뒤덮은 초대형 태극기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반도체 D램 제조의 핵심인 커패시터 전용 증착 장비를 1996년 세계 최초로 개발했지만 1999년 12월 상장 직후 외환위기와 고객사 이탈 문제로 한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극복한 힘은 결국 기술 개발을 통한 해외시장 개척이었다. 태극기는 그 저력과 자부심을 형상화한 상징물이었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지금도 해외 탈주가 빈번한 첨단 제조 업계에서 R&D와 생산을 국내에서만 해결하는 몇 안 되는 회사다.
최근 반도체 공급난과 미중 공급망 경쟁, 원자재 값 상승, 물류난 등 세계적인 불확실성 확대로 이 회사의 존재감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여기에 새 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의지까지 겹치면서 황철주(63)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의 기업관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황 회장은 박근혜 정부 시절 중소기업청장에도 내정된 적이 있는 입지전적 경영인이다.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벤처기업협회장,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등 단일 회사 대표를 넘어 우리 산업계 전반을 대변하는 역할을 10년 이상 맡았다. 한발 앞선 투자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리더십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혁신은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모방에는 경험이 중요하지만 혁신에는 열정·투지·인내 같은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예요. 3차 산업혁명 이후 지식과 정보는 사람의 머리보다 스마트폰에 더 많이 저장되잖아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유일한 원동력은 기술, 지식의 답습이 아닌 혁신입니다. 그것이 제가 R&D에 집중하는 이유이고요.”

R&D센터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황 회장은 ‘혁신’이라는 개념을 수십 차례 강조했다. 직접 작성한 그래프까지 꺼내며 “우리나라 경제는 특허를 통한 혁신으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모방에 따른 기술력, 이론에 치중한 지식으로는 노동생산성을 결코 향상시킬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천연자원이 없는 한국 같은 나라일수록 기술 혁신 외에는 다른 성장 방법이 없다는 주장이다.

“한국이 빈민국 시절 모방을 통해 성장할 때는 헝그리 정신만 필요했습니다. 성과가 업무량에 비례해 올라갔고 젊은 사람들에게도 희망이 있었죠. 그런데 선진국 반열에 진입한 순간부터 업무량을 늘려도 성과가 오르지 않았습니다. 경쟁 국가가 모방하면서 더 싸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모방의 가치는 성장하지 않아요. 여기서 오는 절망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생긴 겁니다.”
혁신을 중시하는 황 회장의 경영관은 평소 그의 동선에서도 드러난다. 황 회장은 경기도 광주 본사가 아닌 용인 R&D센터로 매일 출근한다. 2020년에 건립한 용인 R&D센터는 기존 지식을 답습하지 않을 신입 사원만 채용한다. 고졸이나 문과 출신도 영입 대상이다.

황 회장은 “혁신에는 5~10년이 걸린다. 이후 표준이 정리되고 시장이 조성되면 기술로 바뀌고 다시 지식이 된다”며 “그 과정에서 급격히 떨어지는 혁신의 가치를 10~15년 지속할 유일한 방법이 특허”라고 설명했다. 이어 “혁신하는 사람은 학력·경력과 무관하게 5~10년에 한 명씩 나온다”며 “혁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점을 정부와 사회 지도층이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 회장의 말처럼 주성엔지니어링은 창사 이래 R&D에만 1조 원 이상을 투입했다. 최근에도 매년 500억 원 이상을 R&D에 쏟고 있다. 2017년까지 누적으로 2475개였던 특허 수는 4년 남짓 만에 3000개 안팎으로 늘었다.

황 회장은 정부가 나눠주기식 지원을 그만둬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혁신가를 찾아 한정된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혁신할 수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작업 역시 민간이 전담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벤처 업계의 대부로 잔뼈가 굵은 그이기에 더 힘이 실리는 제언이었다.



황 회장은 “혁신할 수 있는 이에게 정부 R&D 지원을 몰아주고 그 기업이 성장해 또 다른 기업들을 육성해야 산업 생태계가 좋아진다. 혁신만이 블루오션”이라며 “모방이나 개선만 할 수 있는 사람에게 R&D를 하라고 하면 그건 낭비”라고 꼬집었다.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기술 혁신이 끊이지 않는 것은 이를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시스템 덕분”이라며 “주성엔지니어링이 시가총액과 직원 수, 평판 등에서 더 앞서는 미국·중국·일본 반도체 장비 회사들과 경쟁해 이기기 위한 방법도 리더의 혁신뿐”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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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회장은 나아가 혁신가를 솎아낼 조직의 구체적인 가칭까지 거론하며 윤석열 정부에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이른바 ‘혁신기술초기시장육성민간위원회’였다. 황 회장은 “혁신을 기존 기술·지식의 잣대로 평가하면 안 된다”며 “학자나 관료보다는 기업·언론사·증권사 등 시장과 세계적 흐름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기구로 둬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잘라 말했다. “돈만 바라보는 ‘사업가’가 아니라 행복을 만드는 ‘기업가’를 육성하고 R&D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전문가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중국 등이 시장을 열어주지 않으면 우리가 R&D에 투자해도 기득권 국가들이 모방으로 혁신을 빼앗아 돈을 벌게 된다”며 “한국에서 초기 시장을 열어주는 국가 시스템을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이끌 ‘MZ세대(1980∼2000년대에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 대해서는 “고생은 피하더라도 일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반복했다. 회사 직원의 70%가량을 차지하는 MZ세대가 모두 혁신에 신뢰를 불어넣는 사람들로 성장해야 회사도 발전한다는 게 황 회장의 입장이다. 이를 반영하듯 그의 집무실에는 사업장별 직원 현황을 꼼꼼히 알리는 대형 상황판이 걸려 있었다.

황 회장은 “젊은 세대가 더 잘살고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일밖에 없다. 일하는 건 즐거움이자 기쁨”이라며 “리더의 역할은 안 해도 되는 고생과 해야 하는 일을 구분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황 회장의 이 같은 철학은 학연·지연·혈연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기업을 일군 그의 인생 여정과도 맞닿아 있다. 경북 고령에서 빈농의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황 회장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형제들과 서울로 올라왔다. 판잣집에서 꿈을 키우던 황 회장은 중학교 3학년 때 “앞으로는 전자 분야가 유망하다”는 친구의 조언에 공업고등학교 전자과로 진학했다.

고교 졸업 후 울산의 한 섬유 공장에 취업했으나 대학교 졸업자와 고교 졸업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크다는 사실만 체감했다. 황 회장은 인하공업전문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가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다시 편입했다. 전문대 졸업자에 대한 대우 역시 고졸자와 큰 차이가 없다고 느껴서다.

어려운 형편 탓에 학업을 병행할 수 있는 직장이 필요했다. 반도체라는 말도 생소하던 1980년대에 관련 기업에 첫발을 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에는 단순히 3교대 근무가 가능하다는 게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대학 졸업 후에는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입사했다. 회사 업무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던 황 회장은 곧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에 영입됐다.

황 회장이 창업의 길로 들어선 때는 ASM이 갑자기 한국 시장 철수를 선언한 1993년이었다. 새 직장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황 회장은 도전의 길을 택했다. 연구직 출신은 아니었어도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정리한 아이디어는 빼곡했다. 조직원일 때는 무시됐던 아이디어들이 기업 리더가 된 순간 현실화됐다.

황 회장은 “처음에는 기존 반도체 장비 6대를 개조하는 일로 종잣돈을 마련했다”며 “나는 모방을 의미하는 ‘국산화’라는 말을 싫어한다. 혁신은 세계화”라고 설명했다.

최근 글로벌 경기를 뒤덮은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미래 대비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항상 먼저 생각하고 움직였던 게 고비를 극복하는 원천적 힘이 됐다는 판단에서다. 주성엔지니어링은 올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액 1070억 원, 영업이익 306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2.0%, 90.6% 늘어난 호실적이다.

황 회장은 “최근 반도체 경기는 좋다고 하지만 경기가 아주 좋거나 나쁠 때는 강자들이 시장을 독식한다. 지금이 그런 때”라며 “공급망 제한으로 주문이 들어와도 납품을 못 한다. 약자일수록 공급망이 붕괴되면 성장하기 힘들기에 미래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인=윤경환 기자·용인=강해령 기자·용인=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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