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문을 연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의 에비뉴엘 월드타워점은 ‘여왕의 대관식’을 콘셉트로 중앙 로비를 장식했다. 이 수식어를 시각화한 것이 지하 1층에 자리한 지름·높이 6m의 거대한 왕관과 1~2층을 잇는 30m 길이의 나선형 계단(샤롯데 계단)이다. 명품 브랜드가 대거 입점한 ‘국내 최대 명품 전문 백화점’을 표방한 만큼 이곳을 찾은 고객으로 하여금 ‘궁전에 온 듯한 기분’을 선사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8년 가까이 월드타워점의 상징이자 만남의 장소로 자리를 지켜온 이 황금 왕관이 최근 방을 뺐다. 왕관이 있던 곳에는 샤넬 주얼리의 팝업 매장이 12일부터 한시적으로 운영 중이다.
왕관 철거는 정준호 롯데쇼핑(023530) 백화점사업부 대표의 의중이 반영된 결정이다. 15일 유통 업계에 따르면 정 대표는 최근 회사 인트라넷에 왕관 철거 계획 및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올렸다. 조형물 유지의 비효율성을 언급하면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이를 추진하는 것이 진정한 애사심이라는 취지의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왕관이 자리했던 공간, 일명 왕관 스퀘어는 지하철역을 거쳐 들어온 사람들이 에비뉴엘이나 롯데월드몰로 이동하기 위해 몰리는 곳으로 접근성과 주목성이 높아 여러 브랜드의 팝업 행사가 열려왔다. 그러나 거대한 조형물을 옮길 수 없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불편함이 적지 않았고 왕관이 주변의 입점 브랜드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올해 말이나 내년에는 샤롯데 계단도 사라진다. 이 계단은 총길이 30m의 C자 모양으로 ‘클래식(classic)’과 ‘컨템퍼러리(contemporary)’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았으며 영국 웨스트필드 쇼핑몰을 설계한 데이비드 레너드가 디자인했다. 왕관과 계단이 빠진 지하 1층~지상 2층의 공간에는 향후 대형 미술 작품이 설치될 예정으로 현재 작품을 의뢰할 작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번 조치는 평소 점포 운영이나 관리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정 대표의 경영 철학을 보여준다. 정 대표는 20년 넘게 신세계에 몸담았던 인물로 롯데가 유통 사업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2019년 영입했으며 롯데GFR 대표를 거쳐 지난해 롯데백화점 대표 자리에 올랐다. ‘정통 롯데맨’이 아닌 외부 인사가 백화점 대표에 오른 사례로 오랜 조직 문화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사업 혁신을 주도하리라는 기대가 반영된 인사였다. 실제로 정 대표는 전국 32개 점포 중 수익성 상위 점포를 대상으로 대규모 리뉴얼을 비롯한 투자를 확대하고 그렇지 않은 지방의 일부 점포는 용도를 변경하기로 하며 기존 롯데가 가져온 ‘다점포 전략’을 ‘선택과 집중’으로 수정하기도 했다.
왕관 철거를 단순한 조형물의 변화가 아닌 기존 사고와 관습의 전환으로 해석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조직 일각에서는 ‘오픈 때부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고객에게도 각인된 상징물인데 구시대 유물 취급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지만 정 대표는 인트라넷에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밝히며 변화의 이유를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