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능력을 이야기할 때 기억력이 좋다는 평가는 긍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대다수 문화권에서 이름을 기억하는 건 존중의 마음을 담은 최고의 표시인 반면 이름을 잊는 건 일종의 감정적 무시로 읽힌다. 또한 법정 공방에서 정확한 기억에 따른 증언이 승패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는 숱한 역사적 사례들이 증명한다.
그러다 보니 매일같이 쓰던 익숙한 단어, 오랫동안 기억하던 전화번호나 비밀번호 등이 조금이라도 헷갈리기 시작하면 금세 예민해지고, 섣불리 ‘치매’를 염려하는 말을 내뱉는다. 망각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엔 알츠하이머라는 병의 참혹함도 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인지적, 감정적 망각을 넘어서는 퇴화가 주변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뇌과학의 발전도 ‘어떻게 하면 잘 기억할 수 있고, 그 기억력을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 왔다.
이에 대해 자타공인 기억 전문가인 스콧 A. 스몰 미 컬럼비아대 알츠하이머병연구센터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망각도 자연스러운 뇌의 기능 중 하나라는 점이다. 신간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에서 그는 망각도 정상 과정이며 인지능력과 창의력, 정서적 행복과 함께 사회적 건강에 이롭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 뇌의 뉴런(신경세포)은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가지돌기, 그 끝에 촘촘히 나 있는 가지돌기가시로 구성된다. 새로운 기억이 형성될 땐 뉴런들이 활성화되면서 가지돌기가시가 늘어나 뉴런 간 연결이 강해지는 반면, 인접한 뉴런끼리 동시에 활성화되지 않을 땐 가지돌기가시가 도로 줄어든다. 그러면서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며, 이는 정상적 과정이다. 여기에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뇌 속 메커니즘도 밝혀진 상태다.
하지만 기억력이 더 좋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책은 이 질문의 대답으로서 인간이 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을 때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 보여준다. 먼저 자폐스펙트럼장애(자폐증)으로, 이 환자들은 뛰어난 기계적 암기능력을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탓에 사진 같고 녹음된 듯한 세부적 사항에서 한치도 벗어나면 극도로 불안해진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도 과거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서 심각한 감정적 고통으로 이어지는 케이스로, 뇌 속 편도체의 만성적 과잉 활성화가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책은 인간의 창작 능력이 수면을 통해 뇌 속의 기억을 느슨한 수준으로 떨어뜨린 상태에서 활성화된다는 점에서 망각이 창의성에도 기여함을 언급한다. 아울러 기억이 쌓인 상태에서 형성되는 휴리스틱(직관적 판단)이 편견을 형성한다는 점을 실제 사례를 통해 전하기도 한다. 1만7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