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폭염과 불안한 전력망으로 전 세계에 블랙아웃(대규모 정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가뭄,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전력 공급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세계 각지의 폭염에 따른 전력 수요가 폭발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올 3월 기록적인 폭염을 겪은 데 이어 이달 들어 미국·스페인·독일·프랑스 등도 연일 최고 기온을 경신하자 블랙아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22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북반구의 여름은 대부분 전형적으로 전기 사용량이 정점에 달하는 시기"라며 "올해는 기후변화로 더위가 극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본격적인 여름철이 오기도 전에 이미 폭염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CNN 등에 따르면 스페인 기상 당국은 이날 17개 지역에 고온주의보를 발령했다. 20일 스페인 남부 하엔의 기온이 평년보다 16도나 높은 섭씨 40.3도를 기록하는 등 폭염은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다. 당국은 "나머지 지역의 기온도 평년보다 7도 이상 높았다"며 "5월 중순 기준으로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기온이 21일 38.33도로 1939년에 기록한 5월 최고 기온인 36.67도를 넘겼다. 같은 날 미시시피주 빅스버그도 36.67도까지 오르며 1962년의 최고 기온(34.44도)을 크게 웃돌았다.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 기후예측센터는 올여름 미국 대부분 지역의 평균 기온이 평년을 웃돌 것으로 전망한 상태다. 인도의 경우 이미 올 3월이 122년 만에 가장 더운 3월로 기록된 데 이어 이달 들어서도 폭염이 계속돼 한때 뉴델리 지역의 기온이 49도를 넘어서기도 했다.
문제는 전기 공급량이 이 같은 폭염에 대응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아 정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극심한 폭염으로 에어컨 사용량이 정점에 달한 남아시아에서 이미 전기가 끊기기 시작했다며 파키스탄과 스리랑카·미얀마에 거주하는 3억 명이 정전 사태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인도의 경우 인구 7억 명 이상이 거주하는 16개 주가 하루 2~10시간 전기가 끊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을 포함한 북미 지역에서도 정전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북미전력신뢰도위원회(NERC)는 미국 서부와 캐나다 일부 지역이 올여름 심각한 에너지 부족 위험에 처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심각한 가뭄을 겪은 이들 지역에서는 수력발전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전력 생산량이 줄어든 데다 폭염까지 겹쳐 전력 수급이 불안정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공급망 붕괴로 인한 보수 지연과 러시아로부터의 사이버 공격 가능성, 여름과 가을에 걸쳐 주로 발생하는 산불 등도 정전 위험을 높이는 요소라고 NERC는 설명했다. CNN은 "미국의 에너지망은 노후화돼 업데이트가 절실하다"며 "지난해 발효된 인프라 법안에 수백억 달러를 투입하는 에너지망 업데이트에 관한 내용이 담기기는 했지만 이는 양동이에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유럽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인한 정전 리스크에 직면한 상태다. 블룸버그NEF의 샨타누 제이스왈 애널리스트는 "전쟁과 제재로 수급에 차질을 빚는 상황에서 극단적인 날씨와 코로나19 이후의 경기 반등이 전력 수요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정전이 현실화할 경우 경제 타격은 불가피하다. 인도는 2014년 전력난을 겪으면서 당시 국내총생산(GDP)이 약 5%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추정됐다. 추가적인 에너지 가격 상승도 부담이다. 에너지 가격 오름세는 결국 공공요금 인상으로 이어지며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할 수 있다. 유라시아그룹의 헤닝 글로이슈타인 애널리스트는 "팬데믹으로 2년 이상의 공급망 붕괴를 겪은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후변화에 따른 극단적인 날씨로 전 세계가 고심하고 있다"며 "이 같은 문제들에 더해 대규모 정전 사태까지 발생한다면 수십 년간 겪어보지 못한 식량 및 에너지 부족 사태와 같은 인도주의적 위기가 촉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