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시장경제 등의 가치를 공유한 국가들끼리 안전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는 기조가 뚜렷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표방하는 가치 기반 외교 원칙이 국제사회의 흐름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나경원 전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30일 서울 동작구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세계 경제·정치의 흐름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끼리의 협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나 전 원내대표는 22일부터 4박 5일간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강연총회에 대통령특사단장으로 다녀왔다. 새 정부 출범 후 첫 글로벌 다자 회의인 다보스포럼에 정부 대표로 파견된 것이다. 나 특사 발탁에는 헌정 사상 첫 여성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을 지낸 이력과 2015년 파리기후정상회의에서 한국 대표로 연설한 경험이 고려됐다.
실제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포럼 연설에서 경제안보와 인권,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국제사회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다. EU 집행위원장은 EU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직책이다. 나 특사는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만나 연설에 공감을 표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같은 취지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고 한다.
◇“자유보다 안전이 중요, 가치 공유가 핵심”=나 특사는 경제안보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글로벌 공급망 구축에 있어서 이런 가치 연대 움직임이 확연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예전에는 ‘프리 트레이드(free trade·자유 교역)’ ‘프리 앤드 페어(free and fair·자유와 공정)’가 강조됐다면 이제는 ‘프리 벗 시큐어(free but secure·자유롭지만 안전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프리(자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시큐어(안전)’가 더 중요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가 같은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신뢰하고 공급망 구축의 파트너로 삼는다는 얘기다.
나 특사는 “가치 외교 기조를 취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상당한 위기에 봉착할 수 있고 국제사회에서 소외될 수도 있다”며 “이는 공급망 문제뿐 아니라 새로운 산업 발전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도 이런 기조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미동맹 강화를 기초로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들끼리 교류를 확대한다는 게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이라며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면 우리가 오히려 안전한 공급망을 구축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윤석열 정부가 임기 초반부터 가치 외교에 속도를 내는 것에 대해 “한국이 국운이 있다”고 호평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가 역대 정부 중 가장 빨리 한미 회담을 하고 가치 외교를 하겠다고 천명한 것은 국제사회 흐름에 맞다”고 말했다.
◇“다자주의, 후퇴 아니라 가치 중심으로 변모”=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블록화·소다자주의화되는 경향성과 관련해 가치 중심의 다자주의로 변하고 있는 것이라는 견해도 밝혔다. 그는 “예전에는 일종의 ‘이피션시(efficiency·효율)’ ‘프로핏(profit·이윤)’만 추구했다면 이제는 ‘프롬 이피션시, 프로핏 투 밸류 베이스드(from efficiency, profit to value based)’, 즉 가치를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가 될 것”이라며 “가치 안에서 교역은 더 자유롭고 심도 있게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 특사는 포럼에서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국가 정상급 인사들의 특별 세션인 ‘글로벌 협력의 미래’에 발표자 겸 토론자로 참석해 이 같은 견해를 설파했다. 그는 당시 “안정적인 국제 질서는 주어지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국가 간 협력을 통한 다자주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만 가치 외교는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보다는 가치를 확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덧붙였다. 그는 “가치가 전 세계로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며 “다자주의가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尹, 글로벌 중추 국가 비전으로 규범 선도할 것”=나 특사는 역내 및 국제사회에서 역할과 기여를 더욱 확대해 나간다는 윤석열 정부의 ‘글로벌 중추 국가(Global Pivotal State)’ 비전에 대해 새로운 국제 질서와 규범을 정립하는 데 역할을 하는 기회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한국이 위상에 걸맞은 책임을 다함으로써 규범 정립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특사는 포럼에서 외신들과 간담회를 갖고 이 비전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 국제 질서에 새 판이 짜이고 있기 때문에 규범 정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면 우리 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FMC 참여 필요…녹색산업 파이 키울 것”=나 전 원대대표는 존 케리 전 미국 대통령 기후특사가 이끄는 선도그룹연합(FMC·First Movers Coalition)의 참여 필요성도 언급했다. FMC는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30%를 차지하는 항공·해운·철강·알루미늄 등 주요 8개 분야 탈탄소화를 위해 녹색기술을 구매하기로 약속한 민관 합작 단체다. 기업은 아마존·애플·포드 등 55곳, 국가는 미국·영국·일본 등 9개국이 참여하고 있다. 그는 포럼에서 FMC 지도자 모임 세션에 참석해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기술이 글로벌 공공재라는 윤 대통령의 생각을 공유했다. 나 특사는 “우리나라가 FMC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미래 산업인 녹색산업의 파이를 키울 수 있다”며 “새로운 규범·질서를 만드는 데도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 특사는 포럼에서 토머스 도닐런 블랙록투자연구소 대표를 만나 한국 투자를 요청하고 향후 투자의 50% 이상을 지속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다는 답변을 듣기도 했다. 그는 한국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탄소 중립 노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탄소 중립은 인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공공선의 문제일 뿐 아니라 새로운 미래 산업”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국 탄소 중립은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 들어오는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빨리 ‘퍼스트 무버(선도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 특사는 탄소 중립을 위해 윤 대통령이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 것을 주효했다고 평가했다. 탄소 중립 목표를 적절한 에너지 믹스를 통해 비용 부담 없이 이행해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가 원전을 확 줄이려 한 게 가장 큰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는 “정권 교체로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 데에서도 국운을 본다”고 말했다.
◇"가장 인상적인 만남, 40대 女 우크라 제1부총리”=포럼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만남으로는 40대 여성인 율리아 스비리덴코 우크라이나 제1부총리 겸 경제부 장관를 꼽았다. 우리 정부 인사가 우크라이나 관료를 만난 것은 나 특사가 처음이다. 스비리덴코 제1부총리는 전후 복구 지원과 관련해 러시아 수입에 의존한 화석연료에서 탈피하기 위한 전기자동차와 그린스마트 주택 건설 두 가지를 요청했다고 한다. 나 특사는 “새로운 국가는 그린스마트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며 “국제사회가 그린스마트를 중시하는 것을 알고 새로운 국가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뛰어난 인적 자원과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며 “스비리덴코 제1부총리의 요청 사항을 지방선거가 끝나고 정부에 전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