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로부터의 석유 수입 대부분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유럽연합(EU)이 이번에는 러시아산 석유를 운반하는 유조선의 보험 가입을 차단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보험은 배를 띄우는 데 필수 요건으로 그동안 유럽은 물론 아시아에 대한 러시아의 원유 우회 수출까지 끊을 수 있는 아킬레스건으로 꼽혔다. 러시아는 EU의 금수 조치에 대항해 덴마크·독일로 가는 가스관까지 잠그고 나섰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려 EU와 러시아 간 에너지 전쟁도 격화하고 있다.
5월 31일(현지 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EU 소식통을 인용해 “EU가 러시아산 석유를 운반하는 유조선의 보험 가입을 막는 제재를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는 서방이 약 10년 전 이란 핵 협상 과정에서 이란을 압박하기 위해 적용한 카드로, 지금까지 가해진 러시아 제재 중 가장 강력한 조치라고 WSJ는 평가했다. 유조선은 운항 과정에서 석유 유출 등 각종 사고 위험성이 높아 보험이 필수적이지만 관련 보험 시장을 유럽 업체가 사실상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 등 선박 운영 업체가 많은 나라의 반발이 우려되는 만큼 이들과의 조정 기간을 거쳐 실행까지는 6개월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EU의 새로운 제재는 유럽행 수출길이 막힌 러시아가 쌓이는 원유를 인도 등 아시아로 수출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조치다. 미국에 이어 EU도 러시아산 석유 수입 금지에 나서고 있지만 인도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다. CNBC가 원자재 정보 업체 케이플러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5월 인도의 러시아 석유 수입량은 61만 4700배럴로 1년 전에 비해 9배 급증했다.
이에 더해 EU는 러시아산 원유·석유에 수입관세를 부과하는 카드도 검토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전했다. 앞서 EU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금지하면서도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사정을 고려해 이들 국가의 수입 중단은 유예했다. 헝가리 등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금지하는 날짜를 아직 제시하지 않았는데 만약 최종 시한을 밝히지 않고 시간을 지연시킬 경우 EU 차원에서 관세를 부과하려 한다는 것이다. 관세를 매기면 헝가리 등이 러시아산 석유를 수입할 때 드는 부담이 늘어난다. 이에 관세 부과 카드는 금수 조치 유예 국가들이 신속하게 러시아를 대체할 수입국을 찾도록 압박하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관세 부과안은 EU 27개 회원국 중 과반수의 동의만 얻으면 돼 헝가리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다.
EU가 숨통을 조여오자 러시아는 가스관을 잠그며 맞불을 놓았다. 이날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스프롬’은 루블화로 대금 결제를 거부한 덴마크 에너지 회사 ‘오스테드’와 다국적 에너지 기업 ‘셸에너지유럽’과의 계약 이행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이들 회사와의 계약으로 이뤄지던 러시아 천연가스의 덴마크·독일 공급은 6월부터 중단된다. 전날 가스프롬은 역시 루블화 결제를 거부한 네덜란드 천연가스 도매 업체 ‘가스테라’에 가스 공급 중단을 통보했다.
한편 일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 산유량 합의에서 러시아의 참여를 잠정 중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이날 WSJ가 전했다.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의 올해 원유 생산량이 8% 줄어들어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합의에서 배제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OPEC과 러시아 등 10개 산유국 연합인 OPEC+는 이달 2일 회의를 열 예정이며 이 방안이 합의될 경우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이 원유 생산량을 크게 늘려 국제 유가 안정에 일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