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노말리’는 인간 운명과 실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질적으로 느낀 것은 내 스스로 결정한 삶의 양태, 즉 나를 구성하는 가치관과 사랑하는 존재들은 결코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 작가인 에르베 르 텔리에는 서울시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책을 쓰면서 ‘나라면 내 분신을 만났을 때 공유하지 못하고 협상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제28회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오늘 5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대 소설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강연할 예정이다. 르 텔리에는 1991년부터 단편, 장편, 희곡, 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쓰고 있고 수학자, 언어학자, 과학 기자, 만평가, 라디오 프로그램 고정 출연자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노말리’는 ‘이상’, ‘변칙’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은 시공간에 생긴 오류로 인해 같은 사람들이 탄 같은 비행기가 석 달만에 다시 착륙한다는 황당한 사건을 뼈대로 삼는다. 등장 인물들은 모든 기억과 경험을 공유한 자신의 분신을 대면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늙음에 연민을 느끼고 누군가는 또 다른 나와 만나며 스스로 부인했던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자유 의지나 존재 이유, 운명 등과 같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책에는 성실한 가장이라는 가면을 쓴 청부 살인업자,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비행기 기장, 동성애자임을 숨긴 채 활동하는 나이지리아 뮤지션, 석 달이라는 시간 사이에 연인의 아기를 가진 변호사 변호사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운명과 죽음을 성찰하게 된다.
르 텔리에는 “책을 구상하는 초기 단계부터 ‘내 자신과의 대면’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며 “여러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분신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할 지 궁금했고 자살, 자기희생, 무관심, 협력 등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8명의 인물을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분신이라는 주제는 고대 길가메시 신화나 그리스 신화, 현대문학 등에서 많이 다룬 모티브”라며 “분신 개념은 크게 4가지로 제우스신이 인간의 몸을 빌리는 것과 같은 사칭, 소설 ‘지킬앤하이드’ 처럼 자기 자신이 적이라는 개념, 객관적으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 효과 등이 있는데 이번 소설은 진짜 자신과의 대면을 다뤘다”고 설명했다.
르 텔리에는 2019년부터 국제적인 실험적인 문학 창작 집단인 ‘울리포’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소설 첫 장은 스릴러의 법칙으로 시작했다가 20·30대 미혼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장르인 칙릿, 철학 소설로 장르를 탈바꿈하는 실험적인 요소를 도입했다. 각 인물에 걸맞은 장르를 부여하는 문학적 장치가 소설 전반에 생동감 있는 리듬을 부여한다.
그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같이 가져가기 위해 다양한 장르를 하나로 묶었다”며 “항상 대중적인 소설을 쓰기를 원하는데 더 대중적인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르 텔리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은 장르 소설이 아닌 장르들로 이루어진 소설을 쓴 것”이라며 “아노말리를 읽으며 완전함이라는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
실제 이 소설은 문학성에다 속도감 있는 전개, 공상과학(SF)적 상상력과 미스터리의 결합이라는 대중성까지 갖춘 덕분에 2020년 수상 이래 프랑스에서만 110만부가 팔렸다. 다른 공쿠르 수상작의 평균 판매 부수는 40만부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전세계 45개국에 판권이 팔렸다.
이에 대해 그는 “코로나19 봉쇄가 풀리는 날 공쿠르 수상이 발표돼 독자들이 서점으로 몰려간 데다 해외여행이 금지된 상황에서 책의 배경이 국제적인 점이 탈출구가 된 것 같다”며 “코로나19 이전과 달리 미디어가 많이 다루는 유명 작품만 팔리고 있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전했다.
한국에 처음 온 그는 “한국을 잘 모르지만 프랑스 봉쇄령 기간에 기생충, 오징게임, 부산행 등 한국 영화를 많이 봤다”며 “부산행은 좀비 자체를 심층적으로 다룬다기보다는 사회 군상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고 세상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