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입구와 구조는 노래방처럼 생겼는데 안에 있는 물건들이 수상하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대기실부터 각 방에는 온통 군함 모형들 천지다. 그냥 모형이 아니다. 바다 밑에 가라앉은 군함, 어뢰를 맞는 잠수함,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함선 등 마치 전쟁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곳의 주인은 8년 경력의 디오라마 작가 이원희(42) 씨. 디오라마란 축소 모형에 풍경이나 그림 등을 더해 역사적 사건 등을 재현하는 것이다. 가장 큰 장점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점. 영화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의 주인공 모형을 그냥 만드는 것보다 악당과 싸우는 장면 등을 덧붙이면 더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2일 서울경제와 만난 이 작가는 다른 작가들보다 경력이 길지 않다. 그럼에도 이 분야에서 그는 ‘1인자’로 통한다. 모든 것을 독학으로 습득한 데다 항상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국제 콘테스트에 단골로 불려가는 심사위원이 됐다. 이 작가는 “대만에서 국제 콘테스트를 개최하면서 마니아들을 대상으로 심사위원으로 뽑고 싶은 인물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그때 1등을 했다”며 “그 이후 말레이시아, 마카오, 중국 톈진 등에서 심사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디오라마 작품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군함도 그렇지만 그 안에 세세한 것을 묘사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갑판 위에 있는 해군 모형 하나의 크기는 대략 5~6㎜ 정도. 여기에 권투를 하거나 청소하는 모습을 일일이 담고 심지어 상·하의까지 구분한다. 그는 “큰 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하루 2~3시간 작업을 기준으로 대략 3~4개월이 걸리고, 잠수함을 포함한 작품은 대략 2주 정도가 소요된다”며 “직업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로 남는 시간을 쪼개 작업하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이렇게 만든 작품이 약 150여 개. 이 중 그의 작업실에 남아 있는 것은 약 40~50점 정도에 불과하다. 대부분 적게는 몇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마니아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작가를 디오라마 작가로 세상에 알린 것은 영화 ‘U-571’ 중 잠수함 격침 장면이다. 어뢰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U보트가 불꽃을 일으키며 격침되는 모습은 실제 바닷속의 전쟁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게 한다며 모형 마니아들의 극찬을 받았다. 지금도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은 그냥 평범한 잠수함 격침 장면이 아니다. 여기에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해양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독일의 U보트도 결국은 파국을 맞게 된다는 ‘반전’ 메시지가 내포돼 있다. 그의 작품에는 유독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함들의 침몰 내용을 담은 것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작가는 “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파멸한다는 경고를 담고 싶었다”며 “군대 또는 전쟁을 주제로 하지만 군사력 사용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게 제 작품을 관통하는 진짜 철학”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목표는 제주도나 울릉도 등 우리나라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산대첩이나 명량해전처럼 우리 역사가 담긴 내용을 담는 게 그의 계획이다. 이 작가는 “지금까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태평양전쟁 중심으로 작품을 만들었지만 앞으로는 자연과 우리 역사에 더 중점을 둘 것”이라며 “전함이라는 군사적 요소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비함으로써 전쟁의 무상함을 표현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안타까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때 ‘키덜트’ 열풍을 일으킨 모형 수요는 최근 컴퓨터그래픽(CG)에 밀려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작품을 만들어도 수요가 없어 소화하기가 힘든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전시회를 열면 이전에는 젊은 세대가 많이 찾았지만 지금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분들이 더 많다”며 “디오라마 분야의 경우 일본에 비해 저평가돼 있는 것도 장애물”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