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가 낙태 문제를 둘러싸고 들끓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에 대한 헌법상 권리를 확립시킨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어 50년 만에 미국 내 낙태권이 사라지게 되면서다. 낙태 찬반을 둘러싸고 국론이 갈리는 것은 물론 여성 노동력 상실에 따른 경제적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25일(현지 시간)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전날 미 연방대법원은 낙태에 대한 헌법상 권리를 인정하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찬성 5 대 반대 4로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로 대 웨이드’는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미국 헌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한 사건이다. 대법원의 이날 판결은 ‘낙태에 대한 자유’를 더 이상 연방 헌법상의 권리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에 낙태에 대한 허용 여부와 기준은 각 주(州)가 주법으로 결정하게 된다.
각 주의 입장은 정치 성향에 따라 즉각 갈라졌다. CNN은 이번 판결 이후 최소 10개 주에서 사실상 모든 낙태가 금지됐다고 전했다. 미 CNBC에 따르면 아칸소주와 켄터키주·루이지애나주 등은 낙태 금지령을 즉시 발효했다. 이들 주는 낙태를 중범죄로 규정하고 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한 경우에도 낙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다호주와 테네시주·텍사스주 등은 판결일로부터 30일 안에 낙태금지법을 시행할 예정이며 미시시피주와 노스다코타주 등에서도 낙태금지법이 곧 발효될 것으로 전망된다. 공화당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로이터통신은 이처럼 낙태를 금지하는 주가 최대 25개 주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워싱턴DC를 제외하고 미국이 50개 주로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낙태를 둘러싼 국론이 정확히 반으로 나뉜 셈이다. 대니얼 캐머런 켄터키 검찰총장은 “오늘은 많은 이들이 바라던 날”이라며 켄터키에서 낙태를 하는 것이 이제 중범죄로 간주될 것이라고 밝혔다. 반대로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판결 후 캘리포니아 내 낙태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법안에 서명하면서 “남성이 아이를 낳는다면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고 비판했다.
백악관과 민주당은 즉각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법원과 국가에 있어 슬픈 날”이라며 의회가 낙태권을 성문화하고 각 주가 낙태를 허용하는 법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민주당 소속의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은 “오늘날 미국 여성들은 그들의 어머니들보다도 자유가 적다”며 “이 잔인한 판결은 충격적이고 비통하다”고 말했다. 미국의 동맹국들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미국에서 나오는 소식은 끔찍하다”며 “낙태에 대한 법적 권리를 잃게 될 수백만 명의 미국 여성들에게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 밖에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낙태는 모든 여성의 기본권”이라는 입장을 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로 미국 경제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 여성정책연구소는 낙태권의 제한이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감소시켜 미국 경제가 연간 1050억 달러 상당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추정했다. 텍사스 A&M대의 제이슨 린도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판결로 인한) 결과가 너무 광범위해 계량화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앞서 아마존과 씨티그룹은 직원이나 직원의 배우자가 낙태 등을 위해 주 밖으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겠다고 밝혔으며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A), JP모건, 디즈니, 마이크로소프트(MS), 워너브러더스 등도 이 같은 대열에 합류하겠다고 발표했다. 스타벅스와 테슬라·애플·메타·에어비앤비·넷플릭스·구글·나이키·아디다스·레딧·도어대시 등도 이미 낙태를 위해 다른 주로 이동해야 할 경우 필요한 관련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