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역사속 오늘]기요틴서 처형된 로베스피에르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1794년 7월 28일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이 성난 파리 시민들의 손에 함락됐다. 성직자와 귀족이 오랫동안 독점해온 권력을 뺏기고, 농민에서 지식인까지 아우르는 제3신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거듭되는 혼란 속에서 국민주권의 새 질서를 확립해갈 혁명가들이 속속 무대에 등장했다. 이 가운데 핵심 인물이 바로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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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초반의 신진 정치가 로베스피에르는 국왕 루이 16세의 왕권 남용을 비판하면서 제한선거 철폐와 봉건제 폐지를 적극 주장했다. 급진파인 자코뱅당의 중핵으로 부상한 그는 공화주의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특단의 조치들을 도입했다. 그중 하나가 단두대다. 오늘날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자리에 세워진 단두대는 참수 집행인과 사형수 모두의 고통을 최소화한 시대의 발명품이었다. 발명자의 이름에 따라 기요틴으로 불린 이 살인 장치는 ‘국립 면도기’ ‘미망인 제조기’ 같은 별명을 통해 공포의 대명사가 됐다. ‘혁명의 적’ 제거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반동과 보수 인사들뿐 아니라 당통과 생쥐스트 같은 혁명가들도 희생자가 됐다. 이로써 기요틴은 프랑스대혁명의 난맥상과 예측 불가능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다. 혁명의 가속화를 위해 기요틴을 적극 활용했던 그도 결국에는 기요틴에 희생됐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그에게 환호했던 파리 민중이 이제는 그의 죽음 앞에서 박수 쳤다. 상황이 돌변했다. 어떤 역사가는 재판받는 자와 재판하는 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것이라는 말로 혁명의 본성을 요약했다. 프랑스대혁명이 바로 그랬다. 절대군주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기요틴에서 처형된 바로 다음 해에 로베스피에르도 같은 운명을 겪었으니 말이다. 로베스피에르와 동료들이 일거에 축출된 1794년 7월 28일의 사건을 역사가들은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부른다. 이 사건은 이후 전개될 현실 정치의 예측 불가능한 논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비정성시 같은 권력의 잔혹함과 일장춘몽 같은 권력의 무상함은 지금도 재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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