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방국 간의 공급망 구축을 뜻하는 ‘프렌드쇼어링’을 사실상 새로운 통상 규범으로 내세우고 있어 우리 정부의 ‘대(對)중국 딜레마’도 커지고 있다. 최근 30여 년 동안 중국이라는 ‘거인’의 등 위에 올라타 비교적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해왔지만 미국의 프렌드쇼어링 압박에 탈(脫)중국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1일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 2분기 유럽 기업의 23%가 중국 내 투자 계획을 취소하거나 연기할 예정이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데다 미국과 EU가 우방국 위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어 중국 투자 단행 시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고려해야 하는 등 위험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 중인 우리 기업들이 느끼는 불안은 유럽 기업 그 이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말 공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한국 기업 중 86%가 ‘투자 환경이 10년 전 대비 악화됐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정부 리스크(38.1%)’와 ‘국내외 기업 간 차별(20.5%)’ 등 중국 정부의 일방적 산업 정책 외에 ‘미중 무역 분쟁 심화(18.2%)’도 투자 환경 악화 이유로 꼽았다.
우리 기업의 중국 사업 철수도 잇따르고 있다. 삼성SDI는 지난해 중국 배터리 팩 공장 두 곳을 폐쇄했고 LG전자도 지난해 중국 내 공장 두 곳의 가동을 중단했다. 국내 기업의 미국 투자도 늘어나고 있다. 삼성전자가 텍사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 건설 등에 총 170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을 비롯해 SK그룹은 반도체·바이오·에너지 분야에 220억 달러, 현대차그룹은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및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등에 105억 달러, LG그룹은 배터리 공장 증설 등에 110억 달러를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기존 공급망 의존도, 이미 단행된 중국 내 현지 투자 등을 감안하면 탈중국 정책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반도체만 해도 중국에 대규모 메모리 공장이 있다. 이재수 전경련 아태협력팀장은 “현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국 투자를 검토했던 사업자들도 최근 미국이나 동남아시아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다만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라 공장 철수 시 기존 투자자산을 모두 가지고 나오기 쉽지 않다는 말도 나오는 등 관련 리스크가 상당한 만큼 중국 내 사업을 재편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