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무역수지가 46억69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하며 넉달 연속 무역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넉달 연속 무역수지 적자 기록은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이후 14년 만이다. 한국 무역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던 대(對) 중국 무역수지도 30년만에 3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 우려 확산 및 석유 등 에너지원 가격 급등으로 올해 연간 기준 무역적자를 기록도 확실시 된다. 지난 30여년간 중국이라는 ‘거인’의 등에 올라타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한국경제가, ‘차이나 굴기’에 선진국 문턱에서 미끄러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4년만의 年 기준 무역적자 불가피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무역수지가 46억6900만 달러를 기록해 올해 누적 무역적자 규모가 150억 달러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무역적자의 원인으로 석유 등 에너지원 가격 급등이 첫 손에 꼽힌다. 지난달 원유·가스 ·석탄 수입액은 185억달러로 전년 동기(90억달러) 대비 두배 이상 급등했다. 이에 따라 지난달 전체 수입은 653억69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21.8% 늘었다.
중국의 도시 봉쇄 영향에 따른 수출 감소로 대 중국 무역적자가 이어지고 있는 점도 적자 규모를 키운다. 우리나라는 올 5월 중국과의 무역에서 28년여만에 무역적자를 기록한 이후 30여년만에 석달연속 무역적자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대 중국 무역에서 석달연속 무역적자를 기록한 것은 32년 만이다. 최근 석달간 대 중국 누적 무역적자 규모만 28억7000만 달러에 달한다.
지난달 수출은 21개월 증가세를 이어가며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곳곳에서 ‘적신호’가 감지된다. 한국경제 수출의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반도체 수출증가율은 2.1%로 2020년 6월(-0.03%) 이후 25개월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대 중국 수출 증가율 또한 지난달 2.5% 하락해 두달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석유와 같은 에너지원 가격 추이가 안정되지 않을 경우 14년여만의 연간 기준 무역 적자 기록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창양 산업부 장관은 “중국을 포함한 글로벌 경기둔화 영향으로 6월 이후 수출증가율이 한 자릿수에 머물며 수출 성장세 둔화 및 무역적자 확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규제 개선 및 주요 업종별 특화지원 방안 등을 담은 종합 수출 대책을 이달 중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中 위협에 움츠린 韓 주력산업.. ‘최악’만 가리키는 수출지표
‘30년만의 석달연속 대(對) 중국 무역적자, 14년만의 넉달 연속 무역수지 적자,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 무역적자.’
정부가 1일 발표한 ‘7월 수출입 동향’은 ‘역대급’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안좋은 지표가 여럿이다. 이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008년 이후 14년만에 연간기준 무역적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중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지표는 ‘대 중국 무역적자’다. 무역적자의 가장 큰 원인인 에너지원 가격급등은 글로벌 수급 불안이 해결되면 어느정도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반면, 대 중국 무역적자는 10년넘게 지속된 ‘중국 기술굴기’ 정책의 결과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달 중으로 업종별 특화지원안을 비롯해 규제개선·현장 애로해소 등을 총망라한 종합수출 대책을 내놓겠다는 방침이지만, 대 중국 적자 확대 우려는 더욱 커지는 모습이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가 공개한 대 중국 품목별 수출 실적을 살펴보면 무역수지 악화 기조를 뒤집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달 대 중국 무역에서 수출 감소폭이 가장 컸던 품목은 디스플레이다. 디스플레이 수출액은 3억70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34.1% 줄었다. 중국은 2003년 한국의 액정표시장치(LCD) 제조 업체인 ‘하이디스’를 인수한 후 기술·인력 빼가기와 묻지마 지원금 등으로 기술력을 빠르게 업그레이드 시켰다. 현재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와 같은 한국의 미래 디스플레이 사업으로까지 영역을 확장 중이다. 시장조사업체인 옴디아 등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매출액 기준 글로벌 디스플레이 시장 점유율 41.5%를 기록해 사상 처음으로 한국(33.2%)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의 대 중국 주력 수출품목에서 디스플레이가 수년 뒤 삭제될 수도 있는 셈이다.
지난달 대 중국 석유화학 수출 또한 전년 동기 대비 14.1% 줄어 12억2000만 달러에 그쳤다. 산업연구원 등에 따르면 중국은 자국내 수요 초과로 파라자일렌(PX) 같은 석유화학 제품을 수입 중이며, 2025년에는 PX 자급률이 100%로 높아질 전망이다. 서방 제재로 수출 경로가 막힌 러시아로부터 중국이 값싼 원유를 수입한 뒤, 이를 원료로 다량의 석유화학 제품을 값싸게 양산할 경우 한국기업의 관련 제품 수출도 힘들어질 수 있다.
지난달 대 중국 반도체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0.9% 늘어난 39억5000만 달러를 기록했지만, 반도체 또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수입액은 2018년 1232억달러에서 지난해 1225억달러로 줄었으며, 같은기간 메모리반도체 수출입에 따른 무역수지 적자폭도 792억달러에서 463억달러로 줄였다. 그만큼 반도체를 자국 내에서 조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 중국의 낸드플래시 제조업체인 YMTC(양쯔메모리)는 조만간 192단 제품을 양산할 계획이며 D램 제조업체인 창신메모리는 2019년부터 DDR4 D램을 양산하는 등 ‘반도체 내재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은 14나노미터(nm) 이하 반도체 장비의 중국 수출을 제한하며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억누른다는 방침이지만 중국은 꾸준히 해법을 찾고 있다. 실제 중국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SMIC는 특허침해 등 각종 방법을 총동원해 최근 7nm 공정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대 중국 수입 규모는 1년전 대비 가파르게 늘었다. 대 중국 반도체 수입액이 전년 동기 대비 25.1% 늘어난 것을 비롯해 일반기계(14.4%), 컴퓨터(6.4%), 섬유(25.6%) 등 중간재와 완재품을 가리지 고루 수입이 증가했다.
중국의 성장률 하락으로 대 중국 수출규모가 더욱 줄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지난달 대 중국 수출 증가율은 -2.5%로 1년전 대비 뒷걸음질 쳤으며 4월(-3.4%)과 6월(-0.8%)에도 마이너스를 기록한 바 있다. 올 2분기 중국 경제성장률은 0.4%에 불과한데다 한국은행은 중국의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이 3% 중반에 그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여기에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및 ‘칩4동맹’ 출범 등으로 한중 무역에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더해지며 해법 찾기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탈(脫) 중국’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만큼 보다 세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강인수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측면에서 중국과 상호 협업하는 부분이 많은 만큼 서로의 필요에 따른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중국 리스크를 줄여나가야 한다”며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으로 수출 다변화 정책도 병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시욱 한국개발원(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대 중국 교역 문제는 계속 이야기가 나왔지만 정부로서도 딱히 해법을 세우기 쉽지 않다”며 “중국의 수출이 잘돼야 한국 또한 수출이 늘어나는 등 한·중 간의 경제구조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관련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밝혔다.
매몰비용으로 치부하기엔.. 천문학적인 중국내 설비
미국이 우방국 간의 공급망 구축을 뜻하는 ‘프렌드쇼어링’을 사실상 신규 통상규범으로 내세우고 있어 우리 정부의 ‘대(對) 중국 딜레마’도 커지고 있다. 미국의 프렌드 쇼어링 압박에 ‘탈(脫) 중국’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의 올 2분기 조사결과에 따르면 유럽기업의 23%가 중국 내 투자계획을 취소하거나 연기할 예정이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갈수록 낮아지는 데다 미국과 EU가 우방국 위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어 중국 투자 단행 시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고려해야 하는 등 위험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중인 한국 기업들은 느끼는 불안은 EU 기업 이상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말 공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중국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한국기업 중 86%가 투자환경이 10년전 대비 악화됐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정부 리스크(38.1%)’와 ‘국내외 기업간 차별(20.5%)’ 등 중국 정부의 일방향적 산업 정책 외에 ‘미중 무역분쟁 심화(18.2%)’를 투자환경 악화 이유로 꼽았다.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발맞춰 한국 기업의 중국 사업 철수도 잇따르고 있다. 삼성SDI는 지난해 중국 배터리 팩 공장 두곳을 폐쇄했으며 LG전자 또한 지난해 중국 내 공장 두곳의 가동을 중단했다. 국내 기업들은 미국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탈중국’에 힘을 쏟는 모습이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건설 등에 총 170억 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며 SK그룹은 미국 내 반도체·바이오·에너지 분야에 220억 달러를 쏟아 부을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은 미국내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및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등에 105억달러를, LG그룹은 미시간주 배터리 공장 증설 등에 110억달러를 각각 투자할 방침이다.
반면 한·중 기업 간의 협업분야가 많은데다 기존 투자설비 등을 감안하면 ‘탈중국’ 정책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 내에서 각각 대규모 낸드플래시 공장과 D램 공장을 운영중이다. 이재수 전경련 아태협력팀장은 “현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중국 투자를 검토했던 사업자들 또한 최근 미국이나 동남아 등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며 “다만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인만큼 공장 철수시 기존 투자자산을 모두 가지고 나오기는 쉽지 않다는 말도 나오는 등 관련 리스크도 상당한 만큼 중국내 사업 재편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