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찰관이 차도를 지나던 폐지수거 노인을 멈춰 세운다. 노인은 큰 잘못이라도 한 듯 겁을 먹은 채 시선을 회피하고, 주변을 지나던 시민들은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긴장감을 무너뜨린 것은 경찰관이다. 경찰관은 손에 쥔 야광조끼를 노인에게 건넨다. 폐지수거 노인의 안전을 위해 경찰관이 어젯밤 직접 만든 옷이다. 경찰관은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조끼 지퍼를 올려준다. 상황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웃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이런 장면이 현실에도 있을 수 있을까. 영등포서에서 교통경찰로 근무하는 최병락 경위(54)가 주인공이라면 가능하다. 교통경찰로 활동 중인 최 경위는 사회적 취약계층인 폐지수거 노인을 위해 야광조끼·손수레 반사판·안전벨 등을 직접 만들어 지원하고 있다. 아이디어 구상·재료 구입·제작 등 모든 과정을 단신으로 해낸 최 경위를 만났다.
7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경찰서에서 만난 최 경위는 다짜고짜 폐지수거 노인을 위해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말하는 순간에도 위태롭게 도로를 건너는 폐지수거 노인을 생각하는 듯 했다. 자신이 만난 노인들을 이야기할 때 눈시울을 붉힌 최 경위의 말에 다정함이 한가득 묻어나왔다. 최 경위는 “노인들을 돕고 있긴 하지만 정작 활동을 하면서 감사한 마음을 느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최 경위는 “교통경찰 업무를 하며 폐지수거 노인들의 위태로운 상황을 목격한 것이 지원에 나선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본 폐지수거 노인들은 단 하나의 안전장비도 착용하지 않고 차도로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비교적 안전한 인도는 울퉁불퉁하거나 경사가 있어 손수레가 쓰러지기 쉬웠다. 손수레가 이동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공간도 많아 폐지수거 노인들이 인도로 통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최 경위는 “폐지수거 노인들은 안전장비도 없이 차도로 지나다니고 있다”며 “노인들이 보통 손수레 손잡이에 들어간 채 이동하는 만큼 차량과의 충돌사고가 발생할 경우 큰 부상을 입기 쉽다”고 말했다. 최 경위에 따르면 지난해 5월 서울 영등포구 신길로 일대에서 폐지수거 노인이 차량과 충돌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최 경위는 우선 최소한의 안전장비를 제공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는 고물상과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해 페트병과 케이블타이, 15㎜호스와 프리즘 반사테이프를 구입했다. 페트병을 절단한 뒤 반사지를 부착했고, 중앙에 호스를 결합해 ‘손수레 반사판’을 만들었다. 오랜 궁리 끝에 고안한 최선의 방식이었다. 직접 만든 안전벨·야광조끼를 70여 명의 폐지수거 노인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최 경위의 열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현장을 보며 고안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줄이어 쏟아냈다. 고물상 앞 폐지수거 노인의 안전지대를 만들어주는 ‘배려도로 조성’. 손수레 과적을 막기 위한 ‘인바디 손수레’ 등이다. 특히 야간 시간대를 위한 ‘태양광 손수레 후미등’은 최 경위가 ‘2022년 국민안전 발명챌린지 아이디어 공모’에도 도전한 아이디어다. 1차 예선을 통과했지만 2차 선정에서 고배를 마셨다.
최 경위는 한 사례를 설명하며 폐지수거 노인에 대한 인식전환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노인 분에게 야광조끼를 입혀드리려고 하자 그 노인 분은 ‘이거 입으면 뒤에서 차가 손수레에 충돌하지 않느냐’고 말했다”며 “일반적으로 시민들은 큰 손수레를 끌고 차도를 지나다니는 폐지수거 노인을 보며 ‘무법자’로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사고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한마디가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곱씹어봤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할 말을 묻자 최 경위는 “폐지수거노인 또한 우리 사회의 필수 구성원”이라고 강조했다. 최 경위는 “뉴욕이 세계 최대의 지하철 도시가 된 것도 처음에는 얼토당토 않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며 “폐지수거 노인들을 위한 배려도로 설치 등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부분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