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가 큰 코스피 상장사마저 이자비용을 내기 힘겨워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재무 안정성이 위기에 놓였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이 처음으로 빅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을 밟는 등 긴축이 가속화되면서 이자 갚기도 버거워하는 기업들이 증가하고 있다. 경기 둔화와 원자재 값 인상 등으로 영업 환경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빚에 허덕이는 기업들이 장단기차입금을 늘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계심마저 높아지고 있다.
◇상장사 10곳 중 4곳 장사해서 번 돈으로 이자도 못 내=19일 서울경제가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로부터 제공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올해 상반기 이자보상배율이 1에 못 미치는 기업은 총 690개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대비 11.1% 증가한 수치이자 분석 대상 상장사 1675개 중 41.1%에 달하는 규모다. 눈에 띄는 점은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을 나타낸 코스피 상장사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 코스피 상장사 중 155개였던 한계기업은 197개로 27%나 폭증했다. 코스닥 상장사의 경우 같은 기간 466개에서 493개로 5.79% 늘어났다. 이자보상배율은 기업이 번 돈(영업이익)이 이자로 지출되는 비용에 비해 얼마나 더 큰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쉽게 말해 벌어들인 돈과 빌린 돈의 이자로 나가는 비용을 비교하는 셈이다. 통상 1 미만이면 부실 기업으로 여긴다.
전문가들은 빨라진 긴축 시계가 점차 기업들의 이자비용을 늘리면서 이익을 감소시키고 영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현상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올해 초 1.8% 수준에 머물던 국채 3년물 금리는 이날 기준 3.18%까지 치솟았다. 이달 25일로 예정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 인상이 기정사실화된 만큼 기업들의 자금 조달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기업들의 이자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금융·재정 건전성이 우려될 만한 수준까지 악화됐다”고 진단했다.
◇이마트·롯데케미칼(011170) 등 대기업도 속수무책…제조업·IT 발등에 불=주목할 점은 이자보상배율이 1에 못 미치는 기업에 이마트·롯데케미칼·LG디스플레이(034220)·롯데제과 등 굵직한 기업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인플레이션 영향에다 소비 둔화까지 겹치면서 최악의 상반기를 보낸 곳들이다. 영업이익이 크게 줄거나 적자로 전환됐지만 금융 비용은 금리 인상에 몸집을 키우면서 재무구조에 빨간불이 켜졌다.
우선 올해 업황 악화로 영업이익이 적자로 돌아선 기업이 위기에 놓였다. LG디스플레이는 올해 액정표시장치(LCD) 업황 악화로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금융 비용이 소폭 감소하기는 했으나 영업이익이 1조 7000억 원 가까이 줄면서 재무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361610) 역시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200억 원을 기록하면서 이자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영업이익이 크게 줄었지만 금융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기업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지난해 상반기에만 1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거둔 롯데케미칼은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이 607억 원으로 쪼그라들면서 한계기업이 될 위기에 놓였다. 특히 롯데케미칼의 지난해 상반기 금융 비용은 1347억 원이었지만 올해는 2292억 원으로 크게 늘었다. 장현구 흥국증권 연구원은 “화학 업황은 살아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고 상대적으로 선방했던 첨단 소재 사업부마저 수익성 하락이 컸다”고 말했다.
특히 현금흐름이 중요한 정보기술(IT), 게임 업체도 직격탄을 맞았다. 당장 실적을 낼 수 있는 여력 대신 미래 성장성에 초점을 맞춰 자금을 조달해야 하지만 높아진 금리에 이자비용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넷마블(251270)의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은 적자로 돌아선 반면 금융 비용은 220억 원에서 2649억 원으로 10배 넘게 늘어났다. NHN(181710) 역시 영업이익은 반 토막 났지만 금융 비용은 3배 넘게 증가했다.
◇이자도 못 내는데 차입금 늘리는 기업들=더욱 큰 문제는 업황 악화로 이자비용을 내기도 버거운 기업이 울며 겨자 먹기로 장단기차입금을 늘리고 있다는 점이다. SK아이이테크놀로지는 금융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만 올해 상반기 단기차입금이 지난해 상반기보다 174%나 많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CJ CGV(079160) 역시 적자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금융 비용이 35% 증가한 가운데 단기차입금을 17.1% 늘렸다. 영업이익이 600억 원 수준까지 추락한 롯데케미칼의 경우 단기차입금이 전년 상반기의 8700억 원에서 올해 1조 6000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전문가들은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기업들이 불가피하게 차입금을 늘리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수석연구위원은 “미래 성장성에 방점을 찍은 업체들이 차입을 하는 것이 당장 큰 문제라고 보기 어렵지만 제조업처럼 당장 실적을 내야 하는 업체들이 금융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차입금을 늘리는 것은 위험한 징조”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