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 미래 첨단 산업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 인재들을 대거 영입하고 나섰다. 인력 부족이 각 산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제기되는 가운데 국내 기업에서 임원을 지낸 고급 인력부터 이제 막 경험을 쌓기 시작한 젊은 인재까지 해외 기업에 줄줄이 빼앗기면서 미래 산업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인텔·마이크론테크놀로지 등 미국 반도체 제조사들은 최근 수십조 원 단위의 투자를 발표하며 해당 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한국에서 영입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마이크론이다. 마이크론은 극자외선(EUV) D램을 먼저 생산한 경험이 있는 국내 반도체 업체 실무진 영입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2024년 EUV D램 양산을 목표로 기술 연구개발(R&D)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텔은 국내에서 명예 퇴직한 엔지니어 고용도 추진하고 있다.
칩 설계 분야에서도 국내 고급 엔지니어의 이직 사례가 늘고 있다. 애플·아마존·페이스북 등 반도체 사업이 주력이 아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자체 칩 설계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국내 반도체 설계 인력 채용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처럼 미국도 반도체 인력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라며 “국내에서 반도체 연구 노하우를 쌓은 실무진을 고용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완성차 업체도 국내 인력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는 이달 미국 미시간주 디어본과 인근 사업장에서 근무할 주요 직책별 대규모 경력직 채용을 진행했다. 이번 채용에서 주목할 부분은 전문직 외국인 노동자에게 발급되는 ‘H-1B’ 비자 스폰서십을 제공하기로 약속한 공고에서 ‘유창한 한국어·중국어·일본어 능력’을 우대 사항에 포함시킨 점이다. 사실상 한중일 지원자에 가점을 부여해 비자 스폰서십을 보장한다는 의미다. 특히 대부분 직책에서는 비자 스폰서십을 제공하지 않는 반면 배터리 셀과 차세대 배터리 공고에서는 이를 보장한다고 명시하며 3국의 배터리 인재들을 데려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폭스바겐그룹이 투자한 스웨덴 배터리 스타트업 노스볼트는 지난해부터 삼성SDI·LG에너지솔루션 등의 임직원들을 대거 영입해 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노스볼트 창립 초기인 2016년에는 대부분의 한국 직원들이 LG엔솔 출신이었다. 이후 노스볼트가 각형 배터리 개발에 집중하며 이 분야에 강점을 가진 삼성SDI 출신들을 영입해간 것으로 풀이된다.
CATL·BYD 등 중국 배터리 업체들의 한국 인재 영입전도 치열하다. 글로벌 1위 배터리 업체인 CATL은 지난해 한국 지사를 설립한 후 ‘현장 서비스 엔지니어’ ‘기술 지원 엔지니어’ 등 각 직책별 한국 직원 채용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지난달 진행한 채용에서는 우대 요건으로 ‘현대차와 기아의 보고서 작성 방법 및 업무 절차에 익숙한 자’를 포함하며 한국 인재를 적극 영입해 한국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가뜩이나 국내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외로의 유출이 잦아질수록 국내 기업의 경쟁력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소재·부품·장비 회사들의 인력난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외산 장비사들도 고용을 확대하기 위해 급여를 늘리는 상황”이라며 “처우나 규모 차이로 외산 장비사에서 토종 장비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는 드물어 국내 인력들을 우대하고 보호할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