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훌륭한 컬렉션을 가진 컬렉터와 미술관이 있고, 탄탄한 역사의 갤러리들이 있어 첫인상이 강렬했습니다. 여타 아시아 국가와는 다른 문화적 깊이가 있죠. 실험적인 현대미술에도 열린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번 키아프 서울에서 우리 에스더 쉬퍼는 로만 온닥의 퍼포먼스 작품을 선보일텐데요. 그런 (무형의) 작품도 기꺼이 거래될 수 있는 곳이 한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명문 갤러리 에스더 쉬퍼의 에스더 쉬퍼 대표는 최근 세계 미술계가 서울을 주목하고, 아트페어와 갤러리 등이 몰려드는 이유에 대해 한국이 가진 문화적 저력을 첫 손에 꼽았다. 삼성·아모레퍼시픽·코오롱·파라다이스 등의 기업 컬렉션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 인프라로 꼽힌다. 자국 문화 중심의 중국, 보수적 성향의 일본에 비해 한국의 컬렉터들은 실험적인 현대미술에 대한 포용력이 크다고 정평 나 있다.
1989년 독일 쾰른에서 개관했고 1997년 베를린으로 이전해 독일의 대표 화랑이자 유럽의 유력 갤러리로 성장한 에스더 쉬퍼는 오는 31일 용산구 이태원동에 서울 갤러리를 개관한다. 다음 달 2일 코엑스에서 열리는 아트페어 ‘프리즈(Freieze) 서울’과 ‘키아프’ 두 곳 모두에 참가하는 적극 행보를 보이고 있다. 쉬퍼 대표는 29일 에스더 쉬퍼 서울 갤러리에서 진행한 서울경제와 단독 인터뷰에서 “지난 2013년 세계 최정상 아트페어인 ‘아트 바젤(Art Basel)’이 홍콩에서 열리면서 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한국작가와 미술관,컬렉터,역사 등에 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한국을 탐색했다”면서 “한국 태생으로 가장 세계적인 백남준만 보더라도 반세기 전에는 논란일 정도로 앞서 갔지만 지금은 역사의 한 장(章)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실험성이 강한 우리 갤러리 작가들이 한국에서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쉬퍼 대표는 미술사학자인 어머니 손에 이끌려 다양한 현대미술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매들 중 유일하게 “항상 미술을 좋아했던” 그는 25살에 과감히 갤러리를 열었다. 직원 한 명, 전화 한 대 뿐인 작은 갤러리였지만 든든한 작가들이 있었다. 장소 특정적인 대형 설치작업의 필립 파레노, ‘관계미학’의 미디어 아티스트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파격적인 yBa(젊은 영국 작가들) 출신의 안젤라 블록 등이 그와 30년 이상을 함께하고 있다. 에스더 쉬퍼 갤러리는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강연과 공연, 토크쇼와 음악행사를 함께 기획한다. 투자비용이 많이 드는 미술관급, 융합형 전시다. 작품집에 해당하는 ‘아트북’은 그 자체가 작품이라 할 정도로 공들여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덕에 ‘새로운 마켓’을 개척했다. 전통적인 회화·조각이 아닌 퍼포먼스, 영상, 설치작업 등도 쉬퍼 대표는 “팔 수 있는 작품들”이라 부른다. 그는 “실험적인 예술을 존중하는 컬렉터들이 많고, 이런 현대미술을 이해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했다”면서 “이번에 키아프에서 개인전 형식으로 선보일 로만 온닥의 설치작품은 미술관에 모두 판매해 에디션이 2점 밖에 남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에스더 쉬퍼 갤러리는 팬데믹 이후 더욱 적극적인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는 서울 외에도 파리 갤러리를 새로 열었다.
쉬퍼 대표는 “프리즈도 중요하지만 키아프는 한국에서 가장 권위있고 전통있는 아트페어라 참가는 곧 존중의 의미"라며 "한국 관객에게 에스더 쉬퍼의 색깔을 제대로 보일 수 있는 전시와 함께 우리가 방문자가 아닌, 한국 미술계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는 의지를 보이려 한다"고 말했다. 아직 에스더 쉬퍼 갤러리는 한국인 전속작가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그룹전을 통해 이수경·임흥순·김민준 등 한국작가와 꾸준히 협력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