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그룹 총수들이 이달부터 해외 경영에 보폭을 넓히는 것은 무엇보다 올 하반기 글로벌 경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중 갈등에 따른 공급망 불안,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 글로벌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금리 인상, 환율 급등, 경기 둔화, 자국 보호주의 강화 등 경제 전반 곳곳에 적신호가 켜지자 이에 선제 대응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정부가 기업인들을 앞세워 ‘2030 부산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에 열을 올리는 점도 이들의 해외 행보에 주요 발판을 제공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이들 가운데 광복절 특별 복권으로 최근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부회장의 움직임은 그가 재계 1위 총수이자 ‘뉴삼성’ 전략을 추진하는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가 이달 해외 출장 동안 ‘부산엑스포 유치 지원 특사’라는 대통령실 발표 이상의 역할을 자처할 것이라는 게 정·관계와 재계의 대체적인 추정이다. 앞서 이 부회장의 부친인 고(故) 이건희 회장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결정적 역할을 한 바 있다.
재계에서는 우선 이 부회장이 2일(현지 시간)부터 닷새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2’에 깜짝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총수가 전면에서 삼성의 최첨단 정보통신기술(ICT)에 대한 관심도를 높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6월 출장에 이어 영국의 세계적 반도체 설계 업체(팹리스) ‘암’, 독일의 자동차·산업·전력용 시스템반도체 기업 ‘인피니언’, 네덜란드의 ‘NXP’ 등 인수합병(M&A) 후보군들을 다시 한번 살피고 반도체 핵심 장비 등에 대한 공급망을 재차 다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부회장의 발걸음이 이달 중하순 유엔 총회 기간을 전후해 미주 지역으로 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부회장이 부산엑스포 특사 자격을 지렛대로 미국 정·재계 최고위급 인사들과의 네트워크를 본격 재가동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경우 차일피일 미뤄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착공식을 현지에서 직접 조율할 수도 있다.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부산엑스포 유치 공동위원장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국가대표 기업’의 입지를 강화하는 행보에 방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 회장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만날 경우 부산엑스포 현안을 넘어 양국 관계가 한층 개선되는 효과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이와 함께 최 회장이 유엔 총회를 계기로 미국에서 반도체·전기차 등 미래 사업에 대한 공급망과 투자 현안을 둘러볼 가능성도 제기된다. 앞서 최 회장은 올 7월 2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화상 면담을 진행하고 미국에 220억 달러(약 29조 원) 규모의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정의선 현대차(005380)그룹 회장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대응을 목적으로 지난달 23일부터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이 법은 미국에서 조립되고 일정 비율 이상 미국에서 제조된 배터리와 핵심 광물을 사용한 전기차에만 공제 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았다. 현대 아이오닉5, 기아(000270) EV6 등 전기차를 전량 한국에서만 생산하는 현대차에는 불리한 규제다.
정 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뉴욕·워싱턴DC 등을 돌며 규제 대응을 위한 해법도 모색 중이라는 후문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2025년 상반기로 예정된 조지아주 전기차 전용 공장의 완공 일정을 2024년 하반기로 6개월가량 조정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근 미국에서 발생한 팰리세이드·텔루라이드에 대한 대규모 리콜(시정 조치) 사태도 정 회장이 직접 진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구광모 LG(003550)그룹 회장 역시 이달 폴란드로 가 배터리 등 그룹의 핵심 사업을 현지 지휘할 것으로 알려졌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지난달 30일부터 베트남에 머물고 있다. 신 회장은 호찌민 신도시 개발 사업인 ‘투티엠 에코스마트시티 프로젝트’ 기공식에 참석한 뒤 현지의 여러 사업을 두루 점검하고 탈(脫)중국 전략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그는 31일 응우옌 쑤언 푹 베트남 국가주석과도 만나 투자 계획도 논의했다. 신 회장이 이달 베트남에 이어 미국에서도 이미 발표한 투자 사업을 챙길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롯데는 20~21일 미국 뉴욕 맨해튼 남동부 피어17에서 중소기업 150개 사가 참여하는 ‘롯데·대한민국 브랜드 엑스포’를 열기로 했다. 이 기간 신 회장을 중심으로 홍보 영상과 전단을 활용해 부산엑스포를 알릴 가능성이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