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가 아닙니다. 한국 전기차를 목표로 한 명백하고 고의적인 차별입니다."
미국 워싱턴DC에 상주하는 한국 대기업 대관 담당 사이에서는 요새 ‘미국하고 중국이 다를 것이 뭐냐’는 말이 자주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조 바이든 행정부가 환호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 한국 기업들의 미국 사업에 대한 불확실성을 크게 높였기 때문이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한국 정부도 허둥지둥 대고 있으나 이 법안의 ‘한국 전기차 차별(북미산 전기차만 보조금 혜택)’은 의도적이라고 볼 만한 분명한 정황들이 있다.
첫째, 이 법안이 ‘더 나은 재건(BBB)’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던 당시 ‘노조가 있는 미국 자동차 공장에서 생산된’ 전기차만 보조금 혜택을 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회사는 제너럴모터스(GM)·포드·스텔란티스 등 미국 완성차 3곳뿐이다.
‘노조’ 조항이 결국 빠지기는 했으나 이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미국 완성차와 그들 노조의 입김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전기차 생산지가 최종적으로 ‘미국산’이 아닌 ‘북미산’으로 바뀐 이유도 GM이나 포드의 공급망이 멕시코와 캐나다에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와 미국 완성차 업계의 밀착이 증명된 셈이다.
둘째, 시장에서 아이오닉(현대차)과 EV6(기아)의 기세에 밀려 머스탱 마하E(포드)와 볼트(GM)가 주춤하던 상황이었다.
올 6월 블룸버그는 현대차·기아의 전기차들이 조용히 미국의 판매 차트를 뒤집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현대차·기아의 미국 전기차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4%대에서 올해 상반기 9%대로 급등했다. 테슬라가 여전히 압도적이기는 하나 현대차·기아가 2위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워싱턴 정가의 한 인사는 “이미 일본 도요타에 시장을 완전히 빼앗긴 적이 있는 미국 완성차들이 이것을 지켜보고 있기는 괴롭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미국 업체들이 전기차 시장을 선점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한국을 배제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셋째, 이 사태가 벌어진 후 백악관의 반응이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김성한 대통령실 안보실장을 만나 “IRA가 한국 입장에서 마이너스보다 플러스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의회가 결정한 일이라서 정부도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기존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대응과는 다소 뉘앙스가 다르다. ‘IRA가 한국 기업에 도움되는 것도 많으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는 프레임으로 미국이 전환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보란 듯이 IRA를 최대 치적으로 내세우며 ‘메이드 인 아메리카’를 외치고 있다.
이처럼 미국 정치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이번 법안을 두고 과연 ‘항의’만으로 끝낼 문제냐는 목소리가 높다. 대미 외교 전반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올해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0주년을 맞는 해인데 미국 정부는 FTA를 정면으로 위배하며 전 세계 어느 국가보다 미국의 공급망 재편에 기여하는 한국 기업들의 뒤통수를 때렸다. ‘한미 가치 동맹’이라는 듣기 좋은 수사에 한국 정부가 취해 있는 사이에 미국은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챙긴 것이다.
우리와 달리 캐나다는 이 법안의 논의 초기부터 ‘캐나다가 서반구에서 전기차 배터리 핵심 광물을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는 논리를 앞세워 미국을 압박했다고 한다. 미국과 가장 가까운 우방이면서도 자신만의 ‘카드’를 활용해 미국의 자국 이기주의에 대응한 캐나다의 외교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국제 관계는 냉혹하리만큼 비정하고, 호소한다고 약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10년 전 한미 FTA 협상을 주도했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그의 저서 ‘한미 FTA를 말하다’에서 쓴 얘기다. 한국 정부와 기업이 이 교훈을 뼈저리게 되새겨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