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리 급등과 경기 침체 우려로 기업과 투자가들 모두 투자 활동에 소극적인 모습이 두드러지고 있다. 인수합병(M&A) 시장과 벤처캐피털(VC) 업계에선 '벌써 겨울이 왔다’는 말이 돌고 있고, 기업들은 대규모 설비 투자 계획을 미루고 있다. 그러나 일부 경제계 빅샷과 투자업계 거물들은 최근 위기 상황을 오히려 ‘투자 기회’로 보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어 주목된다.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PEF) 운용사’로 꼽히는 MBK파트너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은 지난달 서울경제 창간 62주년 특별 인터뷰에서 “연초보다 글로벌 경제 상황이 악화했지만 투자의 ‘황금창(골든윈도)’은 더 활짝 열렸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은 “사모펀드는 경제가 지금같은 ‘다운턴(경기 하강기)’에 기업을 인수하거나 투자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훨씬 더 많은 자금을 집행하고 ‘업사이클(호황기)’에는 매각에 주로 나서 자금을 회수한다. 그래서 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처럼 경기가 완연한 하락세를 띠고 있는 국면이 오히려 저렴한 가격에 ‘좋은 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라고 김 회장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경기 사이클을 별로 타지 않고 △고객 로열티가 ‘끈적한(Sticky)’ 곳 △현금흐름이 꾸준히 들어오는 곳을 ‘좋은 기업’이라고 강조한다. 김 회장은 “내년에는 신규 펀드 조성에 나설 것”이라며 올 하반기와 내년 중 적극적인 M&A에 나설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스타트업들의 투자에 돈줄이 말라가는 VC업계 일각에서도 최근의 경제 상황을 역으로 투자의 호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올 상반기 263억 원의 급여를 신고해 ‘VC 업계 연봉왕’으로 이름을 올린 김제욱 에이티넘인베스트(021080)먼트 부사장이 이 같은 행보에서 대표 주자로 꼽힌다. 그는 에이티넘인베가 2014년 결성해 1조 원 넘는 이익을 거둔 ‘에이티넘 고성장 기업 펀드’의 투자를 이끈 주역이다.
김 부사장 역시 최근의 경제 상황이 VC 업계에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벤처업계에 닥친 위기가 이전에 겪은 수차례 위기보다 훨씬 심각하다” 면서 “유동성 부족이나 투자 회수 시장의 침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벤처투자가들의 투자 본능마저 크게 위축돼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김 부사장은 “없는 자금이라도 최대한 끌어와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부사장은 “단지 스타트업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고 ‘좋은 스타트업’을 비교적 낮은 가치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는 “VC 간 경쟁도 줄었고 스타트업들이 몸값을 높여 자금을 확보하기도 어려워 돈이 있는 투자가라면 유리한 위치에서 베팅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덧붙였다.
‘불경기에 투자한다’는 명제는 대한상의 회장으로 재계 수장인 최태원 SK(034730)그룹 회장이 앞장서 실천하고 있다. 지난 6일 SK하이닉스(000660)는 15조 원 규모의 신규 반도체 생산 공장(M15X) 투자 계획을 밝혔다. 15조 원의 천문학적 투자 자금 조차 1차 투자 계획일 만큼 최 회장의 투자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SK측은 2025년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다시 활황을 보인다면, 이때 늘어나는 수요에 대응하면서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선제적으로 투자를 집행하고 있다. ‘불황일 때일수록 더 투자해야 한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경영 방침이 이번 투자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도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위기 속에서도 미래를 내다본 과감한 투자가 있었기에 SK하이닉스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면서 “이제는 다가올 10년을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SK그룹은 올 해부터 5년간 반도체·바이오 등에 247조 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어 ‘불황기에 과감한 투자를 집행한다’는 최 회장의 기조가 반도체 뿐 아니라 에너지와 바이오, 미디어 부문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